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5:00:13, Hit : 537, Vote : 60
 2008-02-25 간추린 아리랑 역사

(제1편)정선아리랑의 역사

  설화나 무가나 판소리는 일부이긴 하지만 지배계층에서도 수용되었지만 민요는 기층민에게서만 전승되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한정된 상황이긴 해도 정선아리랑은 다기능적(多技能的) 또는 초기능적(超技能的)인 민요이기에 기층민은 물론 지배계층에서도 불렸다고 본다. 그 증거는 ‘아라리설화’에서 짐작 할 수 있다. 지역민들이 이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점과 다른 토속요에 비교하여 많은 한시형 사설을 갖고 있다는 점과 목은 이색 등의 한시 수용 사실에서 그렇다.(이 점에서 정선아리랑은 생성·발전과 향유가 반드시 민중에 의해서만이라고 전제하는 민요 일반론과는 다르게 볼 수 있다.)  
이런 속성을 전제로 정선아리랑의 사적 전개 양상을 일관하기로 한다. 사적 전개는 곧 기능의 확대와 지역적 확산의 과정이 중심이 되는데, 이는 강원도 산간민요의 일반론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예사롭지는 않은 것이다.
여기서 당연한 전제해야 하는 것은 구전의 특수성과 기록의 희소로 인접학문의 방증적 비교자료와 일반 민요 양상의 추리에 의해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발생 시기
굳이 중국문헌을 들어 말 하는 것이 마뜩치는 않지만 문헌을 들어서 말하자면 중국〈후한서>(後漢書)·〈삼국지〉·〈수서>(隋書)등에 따르면 부여·고구려·예(濊)의 연중행사로 일정한 때 노래와 춤으로써 하늘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다. 더불어 남녀노소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이를 본다면 고대 우리는 노래와 춤추는 것을 유별나게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주술적이고 종교의식적 측면이 강했던 것을 전제로 한 민요를 말 한 것이라고 본다.(민요의 일반적인 발생 동기에 노동기원설과 종교의식설이 있고, 구성과정에 동시발생설이과 전후계기설이 있고, 작자에 대해 개인창작설과 집단창작설이 있으나 필자는 노동기원설, 전후계기설, 집단창작설의 견해에 동의한다.)
민요는 민중의 노래로서 기층문화이긴 해도 끊임없이 상층문화와 관계를 맺으며 전승되었다. 그래서 민요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살피기 위해서는 당연히 민중생활사의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정선아리랑도 마찬가지다. 강원이라는 산악 생활사 내지 정선의 역사에 그 배경을 둔 생활문화사의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70~8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이때는 타제석기 같은 사냥 도구를 써서 이동하며 먹을거리를 구하는 시기로 무리를 지어 공동체 생활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정선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은 발굴되지 않았으나 남한강과 연결된 영월과 평창 지역에서는 이 시기 유적이 확인되었다. 크고 작은 하천과 강이 있고, 동굴과 그늘바위가 많은 입지조건으로 보아 정선지역에서도 발굴될 여지는 충분하다.  
그렇다면 당시 정선 지역 인근에 살았던 이들도 사냥과 함께 나무열매·나무뿌리·견과류 식물 같은 것을 채집하며 하천과 강을 가까이하여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시기의 충남 공주군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된 주술적인 사슴 그림 같은 단순한 조각품을 통해 추정할 수 있듯이, 이들도 매우 단순한 원시종합예술 형태를 영위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을 상정해 본다면, 또한 산간민요의 음악적 기반인 ‘메나리조’(토리의 선법)의 역사적 배경과 이에 연유했다고 보는 ‘뫼아리’ 어원설 등을 감안하면, 정선아리랑이 구석기시대 강원지역 산간민요의 하나로 발생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물론 매우 단조로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짧은 몇 마디 말을 단순 리듬에 얹어 선후창 형식으로 되풀이하여 불렸을 것이다. 그 기능은 산의 메아리를 산신의 화답으로 인식하여 산에 대한 외경심을 표현하여 주술성과 신호성이 중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리~아~라~리”를 되풀이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굳이 곡명은 필요 없었을 것이니 ‘소리’ ‘노래’의 의미인 ‘아리’가 곡명이고 사설이고 여음이었을 것이다.(신라시대의 가요에서 종교적인 신앙요의 경우 기원 또는 집단제례와 관련이 있는 것은 곡명이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의 아라리는 신앙성이 강해 곡명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6천 년경부터라고 보고 있다. 이때는 주거형태와 식량의 확보·저장·가공기술 같은 것이 발현(發顯)되었다는 점에서 구석기 시대와 다르게 본다. 움집을 짓고 살았고, 먼 거리에 있거나 이동 중인 동물을 활로 사냥하게 되었다. 물에서는 낚시나 어망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물고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했고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러자니 여성을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인식했을 것이고, 이 같은 추상적인 사고의 형성은 신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시기에 우리 문화의 바탕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산간민요도 동굴 생활과 움집 살림을 하면서 큰 나무나 큰 바위를 운반 할 때 민요를 불렀을 것이다. 그래서 몇 마디의 사설과 선율과 리듬이 덩어리화 되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예술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이렇게 볼 때 정선아리랑도 같은 형태의 모습을 갖췄을 것이고 발생기 신호와 주술적 기능에 운목과 암석 운반의 효율을 위해 불리는 ‘힘내기’ 기능 같은 것이 덧붙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사회의 계층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이기에 아리랑의 담당 층도 구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시기 역시 멜로디 위주의 가창(선율)민요이기보다는 리듬 위주의 음영민요(吟詠民謠)였을 것이다. 음악적인 면보다는 주술적이고 신호성 같은 원초적인 기능 전달에 비중이 있었기 때문이다.(정동화는 원시시대부터 10세기 신라까지를 생성기, <上古民謠>로 구분하였다.) *이 글은 강등학의 <한국민요의 사적 전개양상>(박이정, ≪한국구비문학사연구≫, 한국구비문학회편, 1998, 97쪽)을 전적으로 의지하였고, ≪정선군지≫ 상권(2003년 판)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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