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5:00:57, Hit : 555, Vote : 63
 2008-04-13 여행가 김찬삼, 세계에 아리랑을 전했다

금년 7월, 5주기를 맞는 세계여행가 김찬삼, 그는 한 대학의 교수에서, 한 분야의 정공자로서의 지리학자에서, 한 문중의 인물에서, 이젠 한국 현대사의 한 역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통해 70년대 우리를 세계에로 안내하여 꿈을 심어준 위인이다. 고산자 김정희와 택리지의 이중환이 국내적인 지리학자라면 김찬삼은 세계를 대상으로 한국 지리학자이다. 한국인으로서 태극기를 달고 총 22회(3번 완전 세계일주, 19번의 테마여행) 세계여행, 통산 160여국 여행, 총 여행시간 15년, 총 거리 지구 둘레 32바퀴, 그렇게 체험 한 ‘세계’를 우리에게 신문으로, 방송으로, 책으로, 강연으로 전해 주었다.
  
그런데 우린 ‘세계여행가 김찬산’에서 읽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선생이 경이로운 해외 사정을 우리에게 전해 준 것 못지않게 우리 사정을 해외에 알려주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의 의미는 6, 70년대 전쟁 당사국과 동포들이 살고 있는 몇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KOREA'는 기껏 동양 한 켠의 식민지 국가 이거나 아니면 한국전쟁으로 인한 ‘휴전과 빈곤과 고아의 나라’ 정도로 알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의 세계여행은 그 자체가 ‘한국’의 새로운 위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거기에 적극적으로 자료를 통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세계적인 여행가’라는 이름으로 알렸으니 이는 당연히 새롭게 평가해야 할 공적이 아니겠는가?

나일강의 기적으로 얘기되는 수단의 한 나체족의 영어를 아는 추장을 만났을 때의 상황인데, 지금 까지 이 곳 까지 오는 과정을 지도를 펴고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 추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워 했다.

“일국의 추장인 자기도 감히 그런 곳을 못 가보았는데 하찮은 네가 그런 곳을 구경할 수 있었단 말이냐? 라는 모양이다. 코리아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를 것이 뻔하였다. 지도에서 한국의 위치를 가리겼다. 추장은 더욱 놀라운 표정을 하며 용타는 듯이 나의 손을 덥썩 쥐었다.(<세계의 나그네>, 172쪽)

이런 차원에서 매우 사소한 실례일 수도 있는데, 우리 국가 <애국가>와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을 알리고 다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두 노래는 한 민족과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이 두 노래에 담긴 사연을 설명했을 터, 세계사적인 3, 1민족운동과 일제의 억압을 저항을 견뎌낸 민족의 저력과 응집력을, 그래서 분단 상황이지만 어느 민족 못지않게 전통문화를 지키며 민주주의를 꽃피워 가고 경제적 성장을 해가고 있음을 전하지 않았겠는가?  

중앙아메리카(Midele America) 바나나와 커피 산지로 이름난 온두라스(Honduras) 여행 때, 수도 테구시갈파(Tegucigalpa) 교육위원회 장학사와 함께 한 여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마침 참관 하게 된 학급은 음악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환영의 뜻으로 자기 나라 국가를 불러주었다.

“여학생들이 자기나라 국가를 들려주었는데, 그 가사의 내용인즉, 피로서 대결하지 말고 손을 잡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흔히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는 거의 모두가 자기 나라의 영광을 노래한, 이른바 네셔널리즘에 입각한 내용들이지만 이 나라의 국가는 자기 나라의 긍지와 편애(편애)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계성(世界性)을 띠었다는 것이 특이했다.
이것은 이 나라 국민이나 위정자들의 평화애호 정신이 강렬하여 國歌에 이런 평화정신이 반영 된지는 모르나 어쨌든 훌륭한 가사였다.”

선생의 국가(國歌)에 대한 인식이 분명함을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많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국가와 애국가(愛國歌)를 혼동하여 일반적으로 ‘애국가’로 통칭했을 때였는데 선생은 이를 분명하게 국가의 ‘곡명 애국가’를 구분 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역시 선생이 ‘세계인’으로서의 식견의 소유자임을 알게 해 준다.
선생은 학생들로부터 온두라스 국가를 듣고 답례했다.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른 것이다. 그 결과를 여행기 <김찬삼의 세계여행기>에 ‘갈채를 받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그 갈채는 외국에서만 받을 수 있다는 단서도 달았다.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도 인기였다.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 민요야 말로 세계에 자랑 할만하며 삼박자(三拍子)로서 어느 나라 사람이나 흥겹도록 된 국제성(國際性)을 지닌 때문일 것이다. 노래는 한국에서 배워서 발표회는 외국에서 하는게 효과적이라고 느꼈다.
내 서투른 노래가 본국에서는 쓸모 없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당시 음악인으로서 음악회를 통해서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의례적인 경우가 아니고, 순수하게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KOREA'의 상징으로 <애국가>와 <아리랑>을 세계에 전파시킨 이는 선생이 처음이고 유일하지 않았겠는가?  
당시 온두라스는 시내를 달리는 버스에 유리창이 없었고 통나무로 된 바퀴의 달구지가 함께 달리는 곳이 었다니····.
<각주>
1 브라질 여행 때는 상파울로 아가잰타(Agazenta) 신문에 1, 2차 방문 때 모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이는 당시 우리 교민들에게 조국을 크게 인식되는데 기여 했다. 이는 브라질 교민들이 신문사에 편지로 곡 만나고 싶다는 편지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실제 2차 여행 때는 1925년 이민와 사는 1세대 김수조 씨를 만났다고 했다.(『김찬삼의 세계여행』 1권, 350쪽)
2 1052년 컬럼부스가 최후의 항해 중 도착, 깊은 바다에 접한 땅이라 해서 ‘깊은 바다’라는 의미의 온도라스라고 붙였다고 한다.
3 추정이지만 선생이 국가<애국가>와 민요<아리랑>을 직접 부를 만큼 관심을 가진 것은 조국을 알리려는 애국심에서 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지만 간접적인 이유를 있다면 아프리카 횡단 여행 중 네델란드 여객선 <보이세반인호> 선상에서 음반을 통한 <동양음악의 밤> 에서의 경험 일 것이다. 즉 구미사람들은 신기하게 듣고 , 동양인은 향수에 젖어 제각기 듣고 있었는데 “뜻 밖에 아리랑이 나왔다. 정말 기뻤다” 그런데 해설에서 어느 나라 노래인지를 모른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선생은 “나는 엄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우리의 것이라고 하였다. 세계는 바야흐로 일본 붐 시대이어서 일본 노래는 세계인들이 한 몫 한다”고 했다. 이러한 경험이 두 가지 노래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제2권,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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