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5:01:46, Hit : 587, Vote : 77
 2008-12-19 제도권과 아리랑의 만남, 󰡔조선민요 아리랑󰡕(상)

제도권과 아리랑의 만남, 󰡔조선민요 아리랑󰡕(상)

‘한국인에게 아리랑은 진언(眞言)이다’(직지사 관응 스님), ‘아리랑은 고난의 꽃이다’(시인 고은), 이런 진술은 아리랑이 단순한 민요가 아닌, 그 이상의 상징 체계임을 말한다. 아리랑이 ‘문화의 아이콘’, ‘한국의 창(窓)’, ‘민족문화의 정수(精髓)’ 등으로 말해지는 소이일 터, 사실 이러한 아리랑의 위상은 명시적으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형성되어 유행의 정상에 위치하게 된 1930년대부터 부여된 것이다. 바로 1928년 12월 잡지 󰡔별건곤(別乾坤)󰡕에서 <아리랑>의 유행상을 <신유행 괴유행(新流行 怪流行)>으로 표현한 것과 1930년 1월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최고의 유학파 가수 채규엽이 음반사의 요청으로 <아리랑>을 취입한 배경에서 알 수 있다.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1950년대 역사학과 국문학 측면에서 이병도와 양주동이, 60년대 민속학 측면에서 임동권이, 70년대 강원도 연고 연구자들로부터 향토사 측면에서였고, 80년대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의 폭이 넓어졌고, 오늘에서도 어떤 분야에 못지않게 집중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의 폭은 대개는 지역 민요의 한 개체로 또는 전체 아리랑 구면을 포괄하여 사설과 음악적 선율 분석에 치우쳐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1986년 최초로 아리랑 자료집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발간한 이후 아리랑은 이미 노래 갈래나 특정 예술작품 명칭만이 아닌 ‘문화어’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다. 민요․유행가․영화․무용․문학․생활사 등에 기층화 된 사실과 나운규 감독의 영화<아리랑>(1926)과 혁명가 김산의 󰡔song of ariran󰡕(1941)에서의 저항정신이나, 정치학자 고권삼의 계급성, 북한의 이데올로기 문제까지를 감안할 때,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아리랑을 단지 민속학․국문학․음악학 범주에서만 국면적으로 성격을 규정 하는 것은 아리랑의 전체상을 이해 하는데는 부족하다. 그래서 좀 더 광의적이면서 구체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인데, 그 예의 하나가 아리랑이 우리 근대사의 역정에 함께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그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랑이 구비전승 자료라는 고정된 인식을 넘어 역사 기록물 또는 공시매체(公示媒體)로서의 아리랑의 연대기적 성격을 구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기록화는 아리랑의 근대성을 보여주는 시기로서 1800년대 중반 이후가 된다. 일반화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매체(신문․영화․음반․방송)가 보편화되는 1930년대가 된다. 그러니까 아리랑의 다양한 성격이 형성, 분화되는 기점이 1930년이고, 각각의 성격이 나름의 정형성(canon)을 갖게 되는 시기가 1930년대가 되는 것이다.
이에 필자의 관심은 기록을 통한 아리랑의 역사적 맥락을 짚어내는 것과 기록의 주체를 밝히는 것으로, 그 첫 작업으로 서양 선교사와 일본 기자의 자료를 대상으로 <구한말 아리랑 담론의 실상과 의미>를 발표한데 이어, 이번에는 1935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김지연 편의 󰡔조선민요 아리랑󰡕의 발행 배경을 살피게 되었다.
편년상(編年上)의 1930년은 민요사, 특히 아리랑 역사에서 기념이 되는 해이다. 처음으로 개인이 과학적인 조사방법에 의한 영남지역 30개군 민요 조사결과가 󰡔영남전래민요집(嶺南傳來民謠集)󰡕으로 정리되고, <매일신보>에서 전국적인 민요 수집이 이뤄졌고, 조선총독부의 민요조사 결과로 아리랑 사설이 정리되어 󰡔조선󰡕지에 발표되고, ‘아리랑’을 표제로 쓴 󰡔아리랑민요집󰡕, 󰡔명곡(名曲) 아리랑창가󰡕 등의 유행가집이 발간되고, 영화 <아리랑>의 후편인 <그 후 이야기>가 개봉되어 주제가 <아리랑>이 다시 극장가를 돌게 되고, 이 곡조를 이용한 <종두선전가(種痘宣傳歌)> 등이 발표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중 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지에 2회에 걸처 수록된 <조선민요(朝鮮民謠)아리랑>이다. 발표 직후부터 인용되었기 때문에 오늘에까지 대표적인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지에 연재하게 된 배경과 이것이 1935년 단행본 󰡔조선민요 아리랑󰡕으로 발행된 배경과 그 차이 등은 검토된 바가 없다. 사실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아리랑에 대한 실상을 특히 굴절된 아리랑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를 통해 아리랑의 친일화 또는 총독부의 정책적 이용 실상에 대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계속)
제도권과 아리랑의 만남, 󰡔조선민요 아리랑󰡕(상)

‘한국인에게 아리랑은 진언(眞言)이다’(직지사 관응 스님), ‘아리랑은 고난의 꽃이다’(시인 고은), 이런 진술은 아리랑이 단순한 민요가 아닌, 그 이상의 상징 체계임을 말한다. 아리랑이 ‘문화의 아이콘’, ‘한국의 창(窓)’, ‘민족문화의 정수(精髓)’ 등으로 말해지는 소이일 터, 사실 이러한 아리랑의 위상은 명시적으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형성되어 유행의 정상에 위치하게 된 1930년대부터 부여된 것이다. 바로 1928년 12월 잡지 󰡔별건곤(別乾坤)󰡕에서 <아리랑>의 유행상을 <신유행 괴유행(新流行 怪流行)>으로 표현한 것과 1930년 1월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최고의 유학파 가수 채규엽이 음반사의 요청으로 <아리랑>을 취입한 배경에서 알 수 있다.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1950년대 역사학과 국문학 측면에서 이병도와 양주동이, 60년대 민속학 측면에서 임동권이, 70년대 강원도 연고 연구자들로부터 향토사 측면에서였고, 80년대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의 폭이 넓어졌고, 오늘에서도 어떤 분야에 못지않게 집중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의 폭은 대개는 지역 민요의 한 개체로 또는 전체 아리랑 구면을 포괄하여 사설과 음악적 선율 분석에 치우쳐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1986년 최초로 아리랑 자료집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발간한 이후 아리랑은 이미 노래 갈래나 특정 예술작품 명칭만이 아닌 ‘문화어’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다. 민요․유행가․영화․무용․문학․생활사 등에 기층화 된 사실과 나운규 감독의 영화<아리랑>(1926)과 혁명가 김산의 󰡔song of ariran󰡕(1941)에서의 저항정신이나, 정치학자 고권삼의 계급성, 북한의 이데올로기 문제까지를 감안할 때,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아리랑을 단지 민속학․국문학․음악학 범주에서만 국면적으로 성격을 규정 하는 것은 아리랑의 전체상을 이해 하는데는 부족하다. 그래서 좀 더 광의적이면서 구체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인데, 그 예의 하나가 아리랑이 우리 근대사의 역정에 함께 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그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랑이 구비전승 자료라는 고정된 인식을 넘어 역사 기록물 또는 공시매체(公示媒體)로서의 아리랑의 연대기적 성격을 구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기록화는 아리랑의 근대성을 보여주는 시기로서 1800년대 중반 이후가 된다. 일반화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매체(신문․영화․음반․방송)가 보편화되는 1930년대가 된다. 그러니까 아리랑의 다양한 성격이 형성, 분화되는 기점이 1930년이고, 각각의 성격이 나름의 정형성(canon)을 갖게 되는 시기가 1930년대가 되는 것이다.
이에 필자의 관심은 기록을 통한 아리랑의 역사적 맥락을 짚어내는 것과 기록의 주체를 밝히는 것으로, 그 첫 작업으로 서양 선교사와 일본 기자의 자료를 대상으로 <구한말 아리랑 담론의 실상과 의미>를 발표한데 이어, 이번에는 1935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김지연 편의 󰡔조선민요 아리랑󰡕의 발행 배경을 살피게 되었다.
편년상(編年上)의 1930년은 민요사, 특히 아리랑 역사에서 기념이 되는 해이다. 처음으로 개인이 과학적인 조사방법에 의한 영남지역 30개군 민요 조사결과가 󰡔영남전래민요집(嶺南傳來民謠集)󰡕으로 정리되고, <매일신보>에서 전국적인 민요 수집이 이뤄졌고, 조선총독부의 민요조사 결과로 아리랑 사설이 정리되어 󰡔조선󰡕지에 발표되고, ‘아리랑’을 표제로 쓴 󰡔아리랑민요집󰡕, 󰡔명곡(名曲) 아리랑창가󰡕 등의 유행가집이 발간되고, 영화 <아리랑>의 후편인 <그 후 이야기>가 개봉되어 주제가 <아리랑>이 다시 극장가를 돌게 되고, 이 곡조를 이용한 <종두선전가(種痘宣傳歌)> 등이 발표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중 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지에 2회에 걸처 수록된 <조선민요(朝鮮民謠)아리랑>이다. 발표 직후부터 인용되었기 때문에 오늘에까지 대표적인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지에 연재하게 된 배경과 이것이 1935년 단행본 󰡔조선민요 아리랑󰡕으로 발행된 배경과 그 차이 등은 검토된 바가 없다. 사실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아리랑에 대한 실상을 특히 굴절된 아리랑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를 통해 아리랑의 친일화 또는 총독부의 정책적 이용 실상에 대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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