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5:02:32, Hit : 573, Vote : 70
 2009-03-09 영화<아리랑>의 감독은 이영철?

영화<아리랑>의 감독은 이영철?

영화<아리랑>은 우리 영화사를 말 할 때 그 첫 작품으로 언급된다. 그 이전에 영화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내세울 작품 다은 작품이란 의미에서다. 그런만큼 이 작품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을 한다. 즉 나운규라는 영화인의 성가를 높인 영화라는 사실, ‘민족영화’라는 영예가 붙은 작품이며, 극영화로서 상업성에 성공한 작품이며, 제1편에서 3편 까지 제작된 첫 속편이 제작된 영화라는 점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영화사적 평가보다는 전통민요 아리랑의 정서를 컨텐츠로 새로운 매체인 영화라는 장르 전환으로 작품화 한 오늘의 시각으로는 ‘융합’을 이뤄낸 첫 작품이라는 사실과 오늘의 ‘민족의 노래’라는 영예를 얻고 있는 ‘본조아리랑’이라는 주제가를 탄생시킨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곧 영화음악의 새로운 탄생과 성공을 알린 것이다. 이에 대해 부연하면 이렇다.
영화<아리랑> 이전의 주제가는 톨스토이 원작 연극<부활>의 극중 노래 <카츄사의 노래>(나카야마 신페이 작곡), 일본의 <금색야차(장한몽·톳도리 순요 채보곡)>(1913년·1,6, 20년 <혁신당>에 의해 재공연 됨)의 주제가, <심순애외 이수일>의 주제가에서 일반적인 인식을 제공했다고 본다. 그런데 1920년대의 문헌에는 ‘주제가’라는 표기 보다는 ‘映畵노래’, ‘映畵小唄’, ‘映畵小曲’이 더 보편적이다.(매일신보, 1928년 5월 6일 영화<세동무> 광고) ‘主題歌’가 일반화 되기는 1934년 말부터 방송에서 ‘영화주제가’를 독립 장르로 방송(1934, 12, 29~)한 시기이고(1935, 2, 27 방송), 독립된 장르로 일반화 된 것은 1938년 10월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이광수의 <無情>을 제작하며 김억 작사, 최남용과 장세정의 노래로 <영채의 노래>가 독립적으로 취입되면서 부터이다.(<無情> 주제가 취입, 조선일보, 1938, 10, 22) 이 음반은 오케 이 레코드사에서 <조선영화 무정 주제가 영채의 노래>(12192)로 1938년 12월에 발매되었다.(조선일보, 1938, 12, 18) 그리고 주제가<아리랑>을 명시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1930년대 들어서인데, 1939년 8월 8일 제2 방송에서 ‘영화주제가’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영화사는 홍보 효과를 노려 공모하는 관례를 낳게 했다.(동아영화제작소 <지원병> 주제가 공모, 포리도루사 음반 취입 예정, 조선일보, 1939, 11, 16) 그리고 1940년대 들어서는 ‘O S T’ 전문 밴드 <OK 씽잉>(조선악극단 자매)이 출현하기도 했다.(명물 OK 씽잉팀 공연, 조선일보, 1940, 6, 14) 그러나 일반화 되지는 않았다. 김연실의 음반에서 ‘映畵小唄’라고 한 것 등(양훈, <유행가의 걸어 온 길>, 조광, 1942, 8권 7호)에 사용된 예에서 알 수 있다. 한편 최초의 영화 주제가 모음집은 1929년 4월 문일편, 團成俱樂部 발행의『朝鮮映畵小曲集』, 12월 영창서관 발행(15錢)의『朝鮮映畵小曲集』(동아일보, 1929, 12, 28. 조선일보 1929, 12, 28. 광고면)이다.
그리고 독립적인 음반으로는 <조선영화 아름다운 희생> 주제가 음반이 있는데, 미스 시에론의 독창으로 발매되었다. 광고문에는 “주제가 레코드 특별발매”로 되어있다.(조선일보, 1933, 5, 21) 1934년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영화주제가’로 장르 표기를 하고 외국영화 주제가 5곡을 모아 방송하기도 했다.(몬테 카롤로의 하루밤, 회의는 춤 춘다 중에서, 한번만과 휄쓰, 호프만의 뱃노래, 춘희 중에서) 이 때부터 ‘영화주제가’가 보편적인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을 보여준다.(조선일보, 1934, 5, 20) 한편 주제가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언급된 것은 유감스럽지만 1934년 윤복진이 <조선레코드 음악 槪評>(4)에서 일본 유행가를 논하는 과정에서다.

“주제가라면 근일에 영화에서는 주제가를 쓴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연극에서도 주제가라는 것이 있었다. 한때에 일본 전토를 풍미하던 <캬츄사 이별의 노래>, <콘드라 선가>, <유랑가> 등은  그 당시 <예술좌>에서 상영한 극의 어떤 장면이나 주인공을 주제로 하여 작곡한 것이다.”(조선일보, 1934, 2, 3)

이와 함께 방송에서는 1939년 9월 제2방송에 ‘레코드 <영화주제가>’ 방송 시간이 있었다.(조선일보, 1939, 9, 19)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영화 주제가의 탄생과 성공 그리고 오늘의 위상을 영화사적으로나 민요사적임은 물론, 그 이상의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아리랑>의 위상에는 하나이지만, 매우 심각한 미스테리가 담겨있다.
그것은 과연 영화<아리랑>은 과연 나운규가 감독을 했느냐 하는 점이다. 시나리오·각색·주연은 당연히 나운규인데, 연출, 즉 감독도 나운규이냐는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진상은 영화사가 김족욱이 영화<아리랑> 광고에 감독을 김창선 ‘津守秀一/쓰모리’로 기록한 것을 들어 나운규가 아닌 쓰모리 감독설을 제기했고, 이를 2년 후 나운규의 직접 진술, ‘모두 내가 한다는 것이 쑥스러워 연출은 쓰모리(조선명 김창선)를 네세웠다.’ (월간 삼천리, <조선 영화 감독 苦心談>)라는 요지의 기사를 자신이 발굴하면서 그간 주장했던 쓰모리 감독설을 촬회했던 것을 영화평론가 조희문교수가  다시 이에 대해서는 다수의 관계자는 나운규 감독설을 이의 없이 받아드리고, 조희문교수를 비롯한 소수의 관계자들이 쓰모리 감독설을 따르고 있다.
다음은 당시 논란의 와중에서 쓰여진 한 기사인데, 후자에 기운 논조 이다.
    
“이와 함께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부분은 <아리랑>의 제작사인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가졌던 쓰모리 슈이치(또는 김창선)의 존재와 역할이다. 안종화는 “우리 말도 글도 모르는 하찮은 존재” 쯤으로 평가하고, 김종원씨 역시 -<농중조>나 <아리랑>에 이름만 걸쳐놓은 인물-로 치부하고 있으나 사실은 영화제작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일본인 요도 도라죠가 세운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은 1926년부터 1927년까지 2년간 존속하는 동안 < 농중조> <아리랑> <풍운아> <들쥐> <금붕어> <뿔빠진 황소> 등 6편을 제작했고 <그의 반생>과 <뜬 세상>이란 2편을 기획했다. 쓰모리는 이들 영화 전부에 감독 또는 총지휘자로 참여했다.”

이 논조는 쓰모리에 대한 비중을 들어 감독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최근 필자는 영화사가 김족욱선생의 도움으로 특이한 기록을 확인 했다. 그것은 매일신보 1937년 2월 19일자 극장 광고에 의외로 <아리랑>의 감독을 ‘감독:李榮哲氏(이영철)’로 표기했다. 주목할 만하다. 이는 전자는 전자대로, 후자는 후자대로 논리를 강화하는데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인 필자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고자 한다. 즉, 당시 배급업자의 권한이 감독권을 능가했기 때문에 2, 3편이 나온 상태에서 배급권자가 독자들에게 새로운 영화처럼 보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내세운 것으로 본다. 이 시기 나운규는 <오목녀> 개봉 후 와병 중이었기에 자신의 의사는 반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도 여지를 준다.
그러나 문제는 앞에서 살핀 나운규의 직접 진술과 그의 일기에서의 주장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쓰모리가 ‘내가 감독했다’라는 직접 증언이 있기 전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내 첫 작품 ‘아리랑’은 상당한 인기로 세상에 反應하는 모양이다. 성공하게끔 전력은 썼으나 그 결과가 그렇게 크리라고는 나도 豫期치 못하였다. 더욱 내가 자신을 얻기는 미치광이 역이 내 맘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 영화의 원작, 각색, 감독자가 나란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된다. 타이틀에 쓰인 김창선(金昌善: 津守秀一)이가 감독인 줄 아는 것이 재미있게 생각된다. 나는 40세까지 배우의 나운규로 행세하다가 40을 넘어서부터 감독의 나운규를 내세울 작정이다.”

동서고금 일기의 진정성을 나운규에게만 배제시킬 이유는 없다. 그럼으로 영화<아리랑>의 감독은 나운규이고, 그럼으로 영화<아리랑>과 그 주제가<아리랑>의 위상은 이의가 없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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