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5:04:29, Hit : 513, Vote : 75
 2010-04-05 정선아리랑의 정체성 문제(하)

정선아리랑의 정체성 문제(하)




지난 회에서는 정선아리랑의 정체성을 규정함에 있어서 그 명칭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폈다. 이 번 회에서는 두 번째로 정선아리랑의 역사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우리 아리랑의 역사, 즉 문헌 기록 이전의 역사를 다루게 된다. 그럼으로 정선 지역에서 전해지는 <정선아라리설화>와 <정선아리랑비>에 대한 재해석이 된다.

그러므로 정선아리랑의 역사 문제는 모든 아리랑의 연원임을 입증하는 절대 조건이다. 어원과 발생설까지 함의하고 있기 때문인데, 곧 정선아리랑의 정체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다음으로 요약된다.

1.정선아라리설화와 정선아리랑 비문

“이(눈이 올라나···) 노래는 旌善아리랑의 始原을 이루는 노래로서 지금으로부터 580년 전 高麗朝가 亡하게 되자 이제까지 官職에 있던 선비들이 이를 悲觀하고 松都에서 杜門不出 隱身하다가 정선에 隱居地를 옮겨 지금의 居七賢洞과 伯夷山을 逍遙하면서 이제까지 섬기던 고려왕조가 그냥 망하고 말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繼承될 것인지 송도에는 險惡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恨歎하고 쓰라린 懷抱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對詞는 이러한 어려운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山中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데 연유한 것이다.”


<정선아리랑비> 陰記 일부이다. 정선군에서 발행된 모든 자료에서 유사하게 전해지는 내용이다. 소위 <정선아라리설화>의 주 내용이기도 한데, 어떤 아리랑도 이 같은 배경설화를 갖고 있지 않다. 예컨대 김지연이 1930년《조선》誌에 발표한 <조선민요 아리랑>에서 정리한 제설들과 비교하면 확인이 된다. ( 김지연의 생애와 <조선민요연구>와, 그리고 단행본 『조선민요 아리랑』의 비교 등은 필자의 <불편한 진실, 김지연의 『조선민요 아리랑』 편찬 의도>(《문헌과 해석》, 2008, 겨울호)를 참고 할 수 있다.)

김지연 정리 <아리랑 발생설>

번호 주장 주장근거 방생시기 주장자

歌謠大方 南道山氏說
‘我耳聾 訛音
경복궁 중수기
영주 남도산


八能堂 金德長氏說
我離娘(아리낭)
경복궁 중수기
순흥 김덕장


尙州 姜大鎬氏說
我難離(아난 訛音리)
경복궁 중수기
상주 강대호


密陽居住 金載德氏說
阿娘(아낭) 訛音
朝鮮中期
密陽 金載壽


尙玄李先生의 說
兒郞偉
古代
李玄尙


新羅舊郡慶州傳說에 因한 說
閼英(알영) 訛音
古代
없음


그런데 제시 된 6종의 발생설은 그에 대응하는 아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저 설임을 말하는 반면, <정선아라리설화>(이 설화의 인물 7인이 굳이 개성 두문동에서 강원도 정선으로 은거하게 되었는가는 역사적 배경에서 들어난다. 즉,
정선 출신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 세력을 도모하기를 청했다가
발각되어 전오륜 등과 함께 주모자로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던 이·초옥사(彛·初獄事)'
결과에 의한 탄압인데, 그래서 둘은 명나라에서 사살되고 그들의 고향인 정선이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로서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가장 먼저 탄압을 받은 곳이 정선이었고,
그런 차원에서 이들의 정서를 공감하여 은신 할 곳이 정선이었던 것이다.)에는 대표사설
<눈이 올라나···>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토속민요임에도 한시형 사설과 한문투가 있으며,
설화의 등장인물 7인과 사승관계인 牧隱 李穡의 시편이 사설화 한 것 등이 확인되고 있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재해석의 단서가 된다. 즉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의 회유와 탄압에도 충절을 지키기 위해 두문동을 벗어나
정선에 은거하게 된 인물들이 지역민들이 부르는 노래에 자신들의 처지를 얹어 부른 것을
지역민들이 함께 불렀거나, 아니면 지역민들이 은거 인물들이 충절을 담아 지은 시를 뜻말로 풀이하여 지신들의 노래에 얹어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유신들이 정선지역에 은거하게 된 배경과 이들을 충절인물로 받아들여 은거처를 제공한 배경에는 <이·초옥사(彛·初獄事)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이성계에 의해 가장 먼저 탄압을 받은 지역이 바로 정선지역일 수 있음을 추정케 한다는데 있는데, 이로해서 지역민들과 고려유신들은 정서를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2.고려말 메나리조 음악

이제 이 같은 상황을 정선아리랑의 역사성 문제로 환원하면 다음과 같다. 즉 정선지역민들이 麗末鮮初에 불렀던 메나리조 소리(아라리)는 태백산맥 중심인 강원·경상지역 일대에서 불린 것으로, 이때는 정선·영월·평창·태백일대에 보편적으로 전승되고 있었다.
그러다 조선이 개구되는 격변기에 고려유신들이 정선지역에 은거하며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은 아라리의 충격이 있게 되었다.( 이 상황이 아리랑의 제1차 충격이다.) 이때의 충격이란 말 그대로 초부의 소리가 고려유신이라는 지식층에 의해 불렸고, 초부의 소리에 문자가 담기게 되었고, 한갓 생활의 노래이던 것이 충절을 담은 노래가 된 것이기에 지역민들은 ‘우리의 노래'로 주체화하게 되었다. 이런 정선 지역민의 자의식은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여 연대의식을 표현하는 노래로도 부르게 된 것이다. 곧 창자·화자·환경의 차이거 좁혀져 ‘공동의 감정적 공감대에 의한 재창조'(communal recereation)가 이뤄진다.( 이 융합에 의한 재창조는 주제가<아리랑>의 형성을 예로 들어 설명이 될 수 있다.
즉, 영화인 나운규와 작곡가 김영환에 의해 형성된 주제가<아리랑>은 당시 불렸던 강원도
아라리(정선아리랑)나 문경아리랑이나 중원아라성과 같은 토속민요가 아니라 일종의
신민요(新民謠)요 유행가(流行歌)이다. 전통음악적인 요소에서 벗어나 일본식(엔카)이나
서양식(왈츠)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들여 긍정적으로는 당시의 모든 음악적 조건을 융합한 ‘뉴 에이지' 음악으로, 부정적으로는 선법과 박자에서는 우리 음악어법에서 일정부분 벗어난 양풍과 왜풍이 섞인 음악이 된다. 이처럼 어떤 충격을 맞아 융합이 이뤄지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게 되고 일정부분 변이형으로 재창조가 이뤄진다. ‘나를 버리고···'라는 제1절과 후렴의 결합은 기존의 잡가 사설의 ‘낮익은 것'들을 수용하여 대표사설로 확립 시킨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공감되는 노랫말이 대표 사설로 위치시키고, 지역의 노래로 특화됨은 물론, 이를 주변 지역에 확산시켜 역사성으로 인식시켰다. 이런 상황이 일정 기간을 보내면서 메나리조 아라리의 전승 중심지를 정선으로 하게 했고, 인근지역은 전승 주변지역으로 변화시켰다.

이런 정황은 왜 아라리의 전승 중심지가 정선지역이냐를 설명해주는 동시에 전승력은 전승지역민의 강한 주체성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 논리를 확대하면 아라리의 전승 중심지가 정선이 된 것은 아리랑의 발생지가 정선이기 때문이라고 보기보다는 살핀 바와 같은 역사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라리의 발상지가 정선, 그 중에서 아우라지냐 거칠현동이냐의 논란은 이 같은 역사성과 민속현상을 도외시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역사는 다음의 몇 가지 단서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게 한다. 즉 19세기 이전의 다음과 같은 아리랑(그 명칭의 음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사연을 정선아리랑의 계속성을 입증하는 것일 수도 있게 한다는 것이다.

3.<청산별곡>과 동시대 노래

첫째는 그동안 논의된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여음 ‘얄리 얄리 얄라성'과의 친연성 문제,

둘째는 <아리랑타령으로 遁甲 變身>( 동아일보, 1928년 11월 30일자. 조선초 일본인들이 인천 부평 일대에 숨어들어 활동하며 조선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아리랑을 불렀다는 얘기다.) 과 <武政과 아리랑>( 김병곤(金秉坤), 매일신보, 이 1935년 8월 22일자. 이성계의 무단정치가 아리랑을 만들어 냈다는 의미로, 이 설은 매우 의미가 있다.) 같은 기사에서 조선 초기의 아리랑이 정선아리랑일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세조 12년 윤3월에 왕이 강릉에 행행했을 때 농가(農歌)를 잘 부르는 이들을 모아 노래를 듣고, 그해 11월 먹을 것이 없어 길거리에서 농가를 부르는 이를 불러 기녀에게 전수케 했다는 것( 『중종실록』권65, 24년 5월조. 정병욱, 『한국고전문학의 이론과 방법』, 425쪽 재인용) 의 농가가 아리랑(아라리)일 수도 있게 하고,

넷째는 일본 구마모토(熊本) <이츠키 자장가>(五木 子守唄)의 존재에서 임진·정유란 이전에 유사 音價로 불린 것이 정선아리랑일 가능성 제시 등이다.( 이츠키 자장가는 임진·정유란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구마모토(熊本)성 축성 후 잡역을 하던 포로들이 벽지(僻地)인 이츠키 지역에 까지가 들어가 살게 되는데, 딸을 낳으면 일본인 집에 팔려가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되고 이들이 아이를 재우며 부른 노래가 이 이츠키 자장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데는 그 하나는 후렴의 “오로롱 오로롱 오로롱바이/ 오로롱 오로롱 바바노마고” 에서 ‘아로롱'이 ‘아리랑'이라는 것으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민요의 주 박자는 2박자 계열인데, 유독 이 노래가 한국 민요의 대부분인 3박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 조선인이 집단 거주 했었다는 역사 사실을 드는데, 이 자료는 일본 민요수집가 마지다(町田嘉章)와 NHK방송이 수집한 음원 자료인 구마모토 이츠키 지방 <이츠키 자장가>로 수록되어 있는데, 만일 이를 아리랑의 한 파생으로 받아들인다면 아리랑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불렸다는 것이 되고, <청산별곡>의 여음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와도 그 관계가 긴밀해 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 에피소드는 논의의 여지가 있는 자료들이다. 가사 등의 정보는 필자의 2002년 신나라뮤직 발매 CD <일본으로 간 아리랑> 해설을 참고할 수 있다.)

이러한 단신들이 정선아리랑의 역사를 입증해주는 역사 사실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선아라리설화>의 재해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정선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의 시원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정선아리랑의 정체성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2010-04-13 아리랑 회엽서(繪葉書)에 대하여
2010-01-28 정선아리랑의 정체성 문제(상)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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