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5:05:28, Hit : 563, Vote : 63
 2010-05-26 ‘아리랑과 함께 30년’에 대한 각주(脚註)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의 노래인 아리랑. 남과 북은 물론 해외 176개국
동포사회 모두가 ‘민족의 노래’로 꼽는 노래. 그래서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선 그 이상의 노래인 것이다. 나는 이 아리랑이라는 이랑을 찾아가면서 그 역사를, 그 위상을 연구하고 있다.
충청북도 두메산골에서 전쟁동이로 태어나 유년의 고개에서 두 가지 아리랑 기억이 있었다.
하나는 곡조도 가사도 언제나 다르게 불렀던 할머니의 자장가 아리랑이고, 또 하나는 서울로 돈 벌러 간 둘째 형이 추석에 내려와 볏짚더미에 기대어 하모니카로 불어준 아리랑 선율이다. 나의 유년기의 아리랑 기억은 이렇게 곡조도 가사도 불분명했지만,
그저 되풀이되어 불려지는 후렴은 나도 모르게 각인되어졌다.
이런 아리랑을 새롭게 그리고 의미있게 받아들이게 된 계기를 맞은 것은 20여년이
흐른 뒤였다. 바로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어느날, 북한군의 대남방송으로
의외의 아리랑을 듣게 된 것이다.
북쪽만을 향한 초병의 기에 ‘나를 버리고·····’에 이어 들려온 아리랑.

‘저기 저산이 백두산이라지/ 해뜨고 달뜨고 별도뜨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


철책과 초병의 총구를 넘나드는 이름 모를 잠자리의 비상과 함께 비무장지대
계곡을 돌아 메아리로 전해져 온 확성기 음으로 듣는 아리랑! 순간 고향을, 어머니를,
그리고 얼핏 전우신문에서 본 철책 너머에 있는 북한 초병의 모습까지 어리어져 왔다.
그리고 그 여운은 그들이 왜 아리랑을 들려 주었을까? 왜 우리가 부르지 않는 가사이었을까?
라는 의문으로부터 다시 한번 또 들어 볼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까지도 갖게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확성기 소리를 듣게 되면, 순간 그 선율과 함께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게 되었다.
  전역을 하고, 복학을 하고, 그리고 방황을 하다가····,
그러던 1979년 겨울 또 다른 확성기 소리로부터의 환청속에서 불현득 아리랑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무작정 강원도 정선으로부터 전라도 진도까지의 ‘아리랑여행’을 시작했다.
첫번째 여행에서 물어 물어 곳곳의 내노라는 지역의 아리랑 소리꾼들도 만났다.
정선의 김병하, 밀양의 김상용선생, 그리고 진도의 최소심 할머니가 그 분들이신데,
아리랑이 ‘곡진한 삶의 소리‘임을 나의 가슴에 전해 주셨다.
지금은 모두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지만 아리랑과 그에 담긴 사연 속에서 만난다.
이렇게 전국적 아리랑 기행의 시작이 나의 ‘아리랑과 30년’의 첫 발자국이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90년, 남북체육회담의 자문위원으로 참가하여 단일팀
단가 <아리랑>을 심의하면서 북한에 또 하나의 아리랑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아리랑이야말로 민족동질성의 분명한 단서이고, 한반도 단가로서 아리랑을 합의한 것은
통일을 전제로 한 ‘앞당긴 역사’임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 서지연구를 중심으로 했던 <국제한국연구원>(원장 최서면)과
<사운연구소>(소장 이종학)에 근무하게 되면서 동학문서 같은 문헌소재 아리랑과
초기 서양선교사들의 출판물 속의 아리랑을 접하면서 공시매체적 기능과 역사에의 의탁성향, 그리고 해외전파 상황 등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아리랑 관련 문헌자료 수집과
연구에로의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 전국의 고서점 탐방으로 어어 졌고,
청계천과 인사동은 생활반경에 두게 되었고, 일본·미국·중국·러시아에 가서
동포들의 아리랑 사연에 함께 흐느끼기도 했다. 역시 아리랑은 민족동질성의
명백한 단서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공력의 덕이겠지만 연구자와 전국 연희자들을 중심으로 법인체 <아리랑연합회>를
결성하고 수집자료와 기행담을 담은『민족의 소리 아리랑』이라는 책도 냈고,
정선·진도·밀양·서울에서 <아리랑축제>도 주관했고, <아리랑 필름찾기>와
<범죄용어 ‘아리랑치기’ 사용하지 않기> 같은 켐페인에도 앞장섰다.
이렇게 아리랑이 나를 30년 동안 지금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이런 내게 이 달 들어 국내와 일본의 두 공영방송사에서 방문을 받았다.
의외에도 모두 ‘6. 25와 아리랑’을 주제로 하는 것은 물론, 표제에 아리랑을 내세운 프로그램
인터뷰였다. 그동안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글도 써왔지만
대개는 3. 1절이나 8. 15 같은 국경일 아니면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을
계기로 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번은 주제와 표제가 ‘한국전쟁과 아리랑’이니 이례적이다.
아마도 금년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라는 계기 때문인 듯한데,
아리랑에 대한 기존 시각인 전통민요나 향토문화 차원으로만 보지 않고,
민족사 속의 아리랑 위상 즉, 역사에의 의탁성향을 포착해낸 것이니
이는 분명 ‘아리랑에 대한 재발견’이고 기존 아리랑에 대해서시각적으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다.

이들은 모든 방송사 프로듀서나 기자 그렇듯, 준비된 콘티(continuity)대로
‘가능한 한 요점만 부탁드립니다’를 인사처럼 전제로 하고 전쟁과 관련된
아리랑 자료의 제시와 정보에 대한 서지사항 정도의 답변을 요청했다.
이에 제시한 자료는 네 가지로서 전쟁심리전에서 보내는 ‘음탄아리랑’,
포로교환 현장의 아리랑, 중공군 군가 <빨지산아리랑>, 그리고 휴전 조인식 후의
아리랑 연주상황이었다. 전쟁자료가 다 그렇겠지만 이들 자료에서도 구구절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1951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에는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백퍼센트 -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아리랑>이란 긴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우리나 님은요 날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대적 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했다고·····’(조선일보.1951.1.12.)

전쟁 중 심리전에 아리랑이 전략적으로 탄환으로 기능한 사실을 보여 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전쟁터에서 이런 가슴 시린 아리랑은 필시 적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총탄의 기능을 했음직하다. 이런 전략은 중공군의 군가 <빨지산아리랑>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밀양아리랑 곡조에 이런 가사로 개사된 군가이다.

‘백두산봉우리에 공화국깃발 날리고
제주도한라산에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항미원조 전쟁 국가집>에 수록된 것이니,
이 또한 음탄의 기능을 확인시켜주는 아리랑 노래이다.
그러나 다음의 두 상황을 이와는 다르다. 그것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휴전회담 조인식 후 악수도, 박수도, 웃음도 없이 중국·북한 측과 미군 측이 등을 돌려 회담장을 나서는 순간,
양측 군악대가 동시에 연주한 것이 모두 아리랑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1953년 12월 2일, 역시 판문점에서의 포로교환 현장에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사실이다.
이 현장에서 보여주는 전쟁 중의 아리랑은 각각 그 상황과 발생이 성격적으로
다르지만 성과는 같다는 사실이다. 비록 중공군과 미국이 당사국으로 휴전을 조인했지만,
형식적으로 남과 북이지만 진정한 당사국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라는 사실을
아리랑으로 상징한 것이고, 동족상잔의 맻힌 아픔을 회한의 공유로 아리랑으로
풀어 보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아리랑이 역사적 현장에 함께 했음을 제시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두 인터뷰에서는 완결점을 찍어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묻지도 않았고 나 역시 나서서 말하지도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시한 바와 같이 역사 속의 아리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아리랑의 미래적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놓친 것이다. 이것이 아리랑 인터뷰의 핵심이며
아리랑 문제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로서는 비록 늦었지만 이에 대해, 그리고 더불어서 왜 아리랑인가를 묻지 않고
그저 어떤 자료, 얼마짜리인가만을 물어 온 이들에게 나의
‘아리랑과 함께 30년’에 대한 각주를 달아 전하고자 한다.
1988년 제1회 <아리랑축제>를 준비하며 고은선생·나운영교수·예술인 허규과 함께 한
<아리랑 모둠이야기>의 결론이기도 하다.

‘아리랑은 저항·대동·상생이라는 3대정신을 동력으로 하여 지금 여기에서 불리고,
내일로 지속될 것이다. 그럼으로 아리랑은 오늘의 민족문제 해결과 내일의
한민족공동체 실현의 역사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기능할 것이다.
보라. 어떤 노래가 있어 역사 속의 그 벅찬 기능들을 대신하였을 것이며,
어느 날이든 찾아 올 통일의 그 날에 남과 북이 또 해외동포가 감격만으로 부를 수 있는가!
이럴진대 누가 아리랑을 과거의 노래라 하며 한(恨)의 노래라고 말 하는가? 이제 알 것이다.
아리랑은 과거를, 한을, 딛고 넘어 오늘에서 내일로 불려지는 ‘오래된 미래,
한민족의 노래’인 것을·······.  




2010-06-01 진도아리랑의 세계(상)
2010-05-13 진도아리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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