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2:38, Hit : 510, Vote : 76
 2004-04-20 경복궁 중수공사와 강원도 아라리의 확산 1

강원도 토속민요 ‘아라리’(정선아리랑)가 경복궁 중수 기간에 공사장에서 널리 불려져 크게 유행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7년이라는 대공사 기간, 주로 전국에서 모여든 부역(賦役)
                        군들이 그 수용자라는 점, 대원군의 하층예술진흥책(下層藝術振興策)으로 인한 많은
                        연예패가 동원되었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노래문화인 잡가(雜歌)의 유통이 가능한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 등, 여러 요인들과 흉합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물리·화학 분야의 융합만이 새로운 반응이 일어 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
                        현상에서도 융합에 있어서는 새로운 가역 또는 순응 반응이 있게 된다고 볼 때, 의외의
                        결과물이 생성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기존의 논의들을 통해 그 융합 상황을 구체화하고 이를 아리랑의 상황에 좁혀 살펴보기로 한다.
경복궁 중수 상황과 민요 상황을 주목하여 거론 한 이는 의외에도 일본인 다까하시(高橋亨)로부터이다.  그는 <조선민요총설> 에서 “경복궁의 공사장은 마치 前 조선의 민요전람회와 같은 정황을 띠고 민요의 교착과 변화와 학습이 활발히 행해졌다. 이 때에 발생한 조선민요의 수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여겨진다.” 라고 하여 각 지역 토속민요의 전이와 이로 인한 새로운 노래의 탄생이 있었다고 했다. 이에 이어 이을 확대한 이는 해방 후 임동권으로, 논문 <서울의 민요>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화하였다.

“爲政者는 役工들의 不滿을 解消시키고 즐겨 作業에 從事케 하기 爲해서 밤마다 歌唱大會를 開催하고 一日의 疲勞와 鄕里의 妻子생각을 밤마다의 노래로 하여 잊게 하였다. (중략) 卽 全國에서 모여든 役工들이 서로 제 故鄕에서 부르든 農歌를 비롯한 諸民謠를 자랑삼아 善唱하였을 것이니 南北의 民謠와 서울과 시골의 民謠가 이 때에 交換되고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지역의 토속민요가 부역군 스스로에 의해 위무의 노래로 불려져 교류되었다는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오히려 다카하시의 포괄적인 상황제시에 비해 축소된 감이 있지만 이 기간에 각 지역 토속민요들
         이 교환되고 전수되었다는 사실은 강조되었다. 그러데 이는 정선에 전해지고 있는 ‘아라리’전설에
         서는 다음과 같이 좀더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1978년 판 《정선군지》의 기사이다.

         “정선아리랑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조말기에 서울 경복궁 중수 때에 이곳에서
           出役하였던 장정이 餘興 시간에 정선아리랑을 구슬프게 불러서 絶讚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
          다 한다.” 구슬프게 불러 절찬을 받아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한 것이다. 이는 강원도아라리
          의 서울 전파 결과로서 아리랑의 역사에서는 하나의 충격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김열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하여 강조하고 있다.  “아리랑의 역사화 내지 사회화를 위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 사실이라면 아리랑의 역사화에 끼친 경복궁 공사판의 영
                           향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간접적인 도화선 내지 원인 구실을 다 했을 것이
                           다. 아니면 경복궁 공사판을 아리랑의 역사화를 위한 최초의 사회사적 충격이라고 부
                           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리랑의 역사화나 사회화에 있어 직접적인 도화선은 경복궁 중수 공사라고 했다. 이러함으로 이 때의 강원도 토속민요 ‘아라리’의 서울 전파는 곧 통속‘아리랑’의 탄생인 것이고, 이의 전국적인 전파·확산의 계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사 상황과 아리랑의 전파 상황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무었인가? 즉, 어떻게 오고 또 성창될 수 있었는가의 문제이다.
강원도의 ‘아라리’가 오늘의 어떤 아리랑 보다 그 역사가 오래 이고, 그 전파권역이 기층화 되어있고, 사설이 적층되어있다는 사실에서 다른 지역의 아리랑 탄생에 모태로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무리가 없다. 그래서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막연하게나마 경복궁 중수 공사를 계기로 강원도의 아라리가 서울에 전파되어 확산 되었다는 추정은 받아들여 저 왔다. 이에 대해서는 1977년 조사된 문화재 관리국 공식 조사 보고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강원도 긴아리랑이 강원도의 모든 아리랑의 원형이며 전국 각지에 퍼져있는 아리랑의 근원이 되는 민요로 생각된다.”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긴아리랑, 즉 긴아라리(정선아리랑)가 다른 지역의 아리랑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조사자들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후의 인과(因果)에 대해서는 nl의 보고서에서는 물론 이후에도 논의가 진전 된바가 없다. 결국 아리랑의 성격변화 시점의 상황과 주제가‘아리랑’으로의 재탄생 배경을 규명하는데는 바로 이 문제가 선결 문제가 되는 것.




2004-05-21 경복궁 중수 공사와 강원도아라리의 확산<2>
2004-01-14 -창작 아리랑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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