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2:58, Hit : 553, Vote : 90
 2004-05-21 경복궁 중수 공사와 강원도아라리의 확산<2>

강원도아라리의 한양 경복궁 중수공사 출현과 성창의 연결고리를 아리랑 스스로는 어떻게 말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의 아리랑 사설은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말 해 준 것으로 본다.

‘한계 인제 황장목이
경복궁 대들보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이 아리랑 각편을 정황을 덧 붙여 해석한다면 이럴 것이다. 즉,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 사이의 준령 한계령(寒溪嶺)의 소나무가 경복궁의 대들보에 쓰이게 되어 이를 운반하기 위해 강원도 젊은이들이 오게 되었고, 이들에 의해 토속 소리인 아라리도 함께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복궁 중수의 주요 재원이 목재와 석재임은 물론 이곳의 목재가 중심이었음이 당연했음으로 이 사설 내용은 기록 이상의 사실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바로, 이런 연유로 아라리는 공사장에 출현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중수 공사 사정은 국가적인 대역사(大役事)였음으로 그 상황은 공사 전담 특별기구인 영건도감(營建都監)의 기록 《營建日記》나 실록인《日省錄》, 총독부가 편찬한《朝鮮史》, 문집《매천야록》과 《화서집》 등에 기술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 속에는 이 같은 상황은 물론 공사 기간에 행해진 예인집단의 연행상황도 그저 홱트(fact) 자체만 기록되었을 뿐 그 전모가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2차적인 기록들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이에는 ‘경복궁창건가’나 ‘한양가’ 같은 가사(歌辭) 작품이 그 하나가 된다. 이들 작품에는 공사 기간 내의 공연 상황이 개괄적이나마 언급되어 있고 이에서 아리랑의 역사와 관련한 사항들을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중건 동기와 발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대로 대원군의 왕권강화와 왕실의 권위신장을 위해 임란으로 소실된 후 중건을 미뤄 왔던 경복궁을 중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 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조대비를 설득, 발의케 했고, 이에 조대비는 조정대신들에게 중건의 찬반 의사를 개진케 해서 대원군의 의중을 아는 대신들의 중건론으로 드디어 고종 2년 4월 3일, 전권을 위임 받아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공사를 착수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경비는 ‘국민 출력(出力)’은 미루고 우선 원납전(願納錢)으로 할 것이며, 실제 가치의 5/1정도인 당백전(當百錢)과 청전(淸錢)같은 악화를 유통시키고, 조대비가 먼저 내탕금(內帑金)을 내고 고종이 친히 경복궁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공사 시작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능수능란한 수단을 발휘하여 전국에서 답지하는 자원 봉역자들을 앞세워 직접 진두지휘하여 공사를 다잡았다.

이러한 대원군의 기획에 의해 공사 초기에는 관민이 비상한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참여하여 무난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년이 못되어 애초의 예상과 다르게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즉 고종 3년, 불란서 함대의 내침에 의한 전란과 원납전의 고갈, 자원 봉역자들의 감소와 모군(募軍)의 어려움, 나아가 공역자들의 처우에 대한 불만 대두, 특히 두 차례나 이어진 공사장 화재
로 가장 중요한 목재 소실과 같은 사건일 것이다. 특히 잠잠했던 유림세력의 거두인 이항로나 최익현 같은 이들이 공사를 중지하여 국민 부담을 덜어야 하고 원성을 사는 대원군은 책임을 저야 한다고 나서는 탄핵 상소가 이어져 동요가 일게 되었다.  
바로 이런 여론은 곧바로 민중의 공시매체인 민요에 반영 되어 나타났다. 다음과 같은 공사를 비아냥한 민요들이다.

‘아랫대궐 웃대궐
景福宮 새대궐
令돌아 오랍신다
네에‘

중수 공사에 종사하라는 령을 내려 부역군들을 끌어 모았고, 석재와 목재를 공납케 하고, 원납전을 기부하라는 대원군의 지엄한 령(令)을 소리의 소재로 희화해 어처구니 없음을 드러냈다. 민폐가 극심해지고 원성이 높아지자 원망조의 노래가 불려지는 것은 어느 시대나 있는 이치였으니 ‘경복궁요’나 ‘경복궁타령’이 이를 맡은 것이다. 묵묵히 복종할 수밖에 없는 민중들이었지만 그 불만을 노래로서만은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태의 혼란상을 시절의 뒤틀림으로 비아냥거린 것이다.  

乙丑 四月 甲子일에
景福宮을 이룩했네
후렴
에 에헤야 에헤야
얼널럴 거리고방에 흥이로구나 에-

석수장이 거동봐라
방망치 들고서 눈만 꿈뻑한다

도편수의 거동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

조선여덟도 유명한 돌은
경복궁짖는데 주춧돌감이로다

경복궁역사(役事)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솔을 언제나 만나볼까

전국적인 창민요로 확산되어 널리 불린 ‘경복궁타령’이다. “간사치 않은 마음의 녹음이요, 분식치 않은 시대상의 거울로서 민요는 역사보다 바른 것”으로 말 할 때 꼽는 이 노래는 기층민중들의 징발상이 생동감 있게 제시되어 있다. 특히 논리상으로는 ‘갑자’ 다음에 ‘을축’을 놓아야 함에도 이를 뒤바꿔 놓고, 매일 오전 11시 45분에 종 33번을 치고 4대문을 연다고 해야 됨에도 역시 문을 먼저 열고 파루를 친다고 거꾸로 말해 지배층의 행위가 뒤죽박죽 말기적인 형세임을 항변 한 것이다. 그러니까 구미각국과 문호개방 문제로 시끄러웠고, 러시아와 청국의 내정간섭이 심한 상태에서 왕권강화만을 내세워 국력을 소모하는 것을 원망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글을 쓴 김연갑님은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로 평생을 아리랑과 함께 살아왔다. 아리랑하면 김연갑을 떠올리듯 그의 삶은 아리랑과 살아왔다.?




2004-10-14 아리랑 그 모정의 세월
2004-04-20 경복궁 중수공사와 강원도 아라리의 확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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