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7:24, Hit : 511, Vote : 72
 2007-09-14 주제가는 누가 먼저 어떻게 불렀나? 169호-

MBC의 보도에 대한 반론-

10월 1일 9시 뉴스에서 김연실의 아리랑 SP음반 발굴 보도를
하면서 이를 주제가<아리랑>의 최초의 음반이라고 했다. 이는 잘못된 보도라는 주장이 있다.
이를 계기로 주제가<아리랑>의 확산 경로를 지난 호에 이어 살펴본다.

영화 주제가<아리랑>만을 독창으로 음반화한 경우를 살핀다. 이 경우 제일먼저 취입 한 이는 채동원(蔡東園)이다. 채규엽으로 더 잘 알려진 우리나라 전문직업 가수 1호로 꼽히는 남성가수인데, 콜롬비아레코드 6회 신보(콜럼비아 제6회 新報, 조선일보, 1930, 2, 7)에 의하면 1930년 1월에 ‘유행가 아리랑’으로 발매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 관현악단의 양악 반주, 즉 일본인 악사들에 의해 반주되었다. 전래민요에는
없는 화성적 요소가 악곡에 첨가되고 반음과 같은 외래 음악적 음계를 사용하여 새로운 선율구조를 가졌다. 피아노 반주의 화성을 바탕으로 나머지 악기가 주선율을 따라가는 양상으로 이는 신민요의  요소이다. 결국 외래음악적 요소는 전체악곡이나 주선율과  전주 악곡 일부에 나타난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초기의 창가 창법처럼 음조의 경직성이 느껴져 완숙한 유행가 창법의
노래는 아니나 민요조도, 그렇다고 유행가조도 아닌 영화 주제가의 수준과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이 음반 뒷면에 영화 주제가<세동무>가 수록된 점과 이 음반 발매를 알린
제6회 신보에 수록된 이진봉의 ‘긴아리랑’이 그 장르를 ‘잡가’(雜歌)로 표기 했다는 점은 비교가 되어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채동원이 부른 아리랑이 영화의 주제가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인데, 영화 주제가<세동무>가 수록된 것은 함께 수록한 아리랑도 같은 영화 주제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신보에 ‘긴아리랑’은 서도잡가라고 한 반면, 이 아리랑은 장르를 ‘유행가’라고 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영화 주제가를 떠나 유행가로 인식되게 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한편 이 채동원 취입 아리랑 음반은 발매 3년 후인 1933년 5월 조선총독부 관보에 조선총독부령으로 <축음기 레코드 취채 규칙>에 의해 발매금지 처분 기록이 나온다.
여기에  아리랑은 금지 대상 맨 첫머리에 올라 있다. 이는 아리랑이 공식적으로는일제하에서 최초의 규제를 받은 노래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때의 발매 금지 처분은 단순하지가 않다. 즉 영화 개봉당일의 전단지 압수와 이 때의 음반 발매금지 처분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단지 압수는 가사의 탄압이 중심이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단지 압수 직전의 <매일신보> 광고에 수록된 문안 중에서 전 4절 가사가 <조선일보> 광고에서는 제4절 문전의 옥답은····”만이 삭제된 것으로 나타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풍년이 와요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산천의 초목은 젊어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 가네


청천 하늘에 별도나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이는 곳 소위 불온 가사 일부가 삭제당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3년의 음밤 판매금지 처분은 영화<아리랑> 자체나 주제가 가사나 곡조와는 무관했다. 즉 아리랑의 유행상과 이 아리랑에 부가되어불려지는 가사의 사회성에 제동을 걸기 위해 아예 ‘치안방해’라는 더 큰 ‘누명’(?)을 씌운 것이다. 이는 1936년 4월호 『삼천리』에 실린 판매금지 음반 대상에 관한 기사에는 아리랑의 금지 이유가 ‘치안방해’로 나와 있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 문자로 나타난 바로는 아무렇지 않지만은 그 입으로 불리워져 나오는 마디에는 너무나 회고적이요,  애상적인 점이 있었음으로’ 금지를 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아리랑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이 아리랑을 받아들이는 민중의 감정이 치안을 방해할 만한 상황으로까지 이어졌거나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주제가의 두 번째 음반화는 채동원의 음반이 발매된 2개월 후인 1930년 3월에 김연실(金蓮實)이 취입, 발매한 아리랑이다. 김연실의 창법은 민요조이나 반주는 양악반주로 되었다. 이는 1930년대 상황인 “조선의 민요에다 양악 반주를 맞춘 그러한 중간층의 비빔밥식 노래가 많이들 유행”했다는 주장에 부합된다.(<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김진송, 삼천리, 1933) 이는 빅터 레코드사(V49071-A)의 <映畵小唄 아르랑>(조선일보, 1930, 3, 14)이 그것인데, 당시의 광고에는 “여러분의 고대하시던 조선명창들의 새로이 너흔 소리판은 우선 좌에 기록한 종류가 오날부터 제공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이 광고 게재 시점인  3월로 발매 시점을 보게 한다.

김연실의 이 음반은 역시 크게 히트를 하여 판매고를 높였다. 이런 상황은 김연실을 영화
<아리랑>의 여주인공 신일선과 함께 ‘아리랑의 여왕’ 또는 ‘주제가를 맨 먼저 부른 가수’로
알려지게 했다.(매일신보, 1933, 6, 17. 삼천리 1932, 10월호) 이로서 전자 채동원의 아리랑은 당시 최고의 가수로서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주제가<아리랑>을 유행시켜 그야말로 영화 주제가를 ‘유행가’로 확산시킨 공로가 있고, 후자 김연실의 음반은 그것이 영화<아리랑>의 주제가임을 명시적으로 밝힌 기념비적인 음반으로 탄생한 것이다.  
한편, 이상에서 살핀 채동원과 김연실이 부른 아리랑이 다른 아리랑이 아니고 바로 영화 주제가<아리랑>이라는 사실은 노래 자체가 알려주고 있지만, 객관적으로는 나운규가 생존했던 1930년 문 일(文一)이 서상호의 도움을 받아 펴낸 《영화소설 아리랑》에 수록한 악보와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되는 바이다. 물론 1926년 이전의 음악 자료, 예컨대 1919년 발행 이상준의 《조선속곡집》등에서 이 곡이 나타나지않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바침 해준다.  

이상에서 살핀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영화 상영 중 무대에서 아리랑을 직접 부른 이는 개봉시에는 이경실이, 재상영 때는 이정숙이고, 주제가<아리랑>을 음반화 한 것은 1929년 영화설명<아리랑>에서는 유경이가 최초이고, 두 번째는 채동원으로 1930년 1월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1930년 3월 김연실이 부른
<영화소패 아리랑> 음반이 된다. 이런 사정임으로 MBC 문화방송 뉴스에서 김연실이 부른 리랑  음반을 가장 앞선 주제가 음반으로 보도한 것은 잘못된 것이 된다.





2007-09-14 아리랑, 백두산을 노래하다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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