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3:56, Hit : 501, Vote : 80
 2005-04-23 아리랑의 선전·계몽가로의 활용 149호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선전·계몽 활동에서 노래가 중요 한 수단으로 쓰인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선전·계몽가 곡조가 아리랑 가락임은 일종의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의 한 형태로서 이미 이 곡조가 민중계층에 일반화가 된 상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음의 종두선전가(種痘宣傳歌)·문자보급가(文字普及歌)·풍년아리랑·비상시아리랑이 아리랑의 전국적인 일반화 현상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 종두선전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호열자 염병엔 예방주사
마- 마 홍역엔 우두넛키

천하에 일색인 양귀비도
마-마 한번에 곰보된다

일반 민중에게 종두 예방주사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계몽가이다. 1930년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백신을 접종하는 것인데 당시 주사(注射)라는 것에 무지하여 이를 피해 다니게 되자 전국 기관을 통해 접종에 대한 홍보를 하게 되었다. 바로 이 노래는 1930년 강원도 이천경찰서에서 등사본으로 배포한 전단을 보고 신문에서 기사화 하여 확인 된 것이다. 여기에 이 가사의 곡조가 ‘아리랑’이라고 표기를 했다. 당시 이 같은 계몽운동은 전 지역 경찰서에서 전개 되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아리랑 곡조를 수용, 홍보에 활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대중화 한 아리랑 곡조를 이용한 것이 된다.

▷ 문자보급 아리랑
우리나 강산에 방방곡곡
새살림 소리가 넘쳐나네
에-헤 에헤야 우렁차다
글 소경 없애란 소리 높다

아리랑 고개는 별고개라요
이 세상 문맹은 못 넘긴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공중에 가고 오는 저 비행기
산천이 우렁찬 저 기차는
우리 님 소식도 알겠건만
문맹에 속타는 이 가슴아

한밤이 대낮된 오늘날에도
눈뜨고 못봄은 어인일이냐
배우자 배우자 어서 배우자
아는 것 힘이요 배워야 산다

1931년 <조선일보>가 전개한 문자보급(文字普及)운동 일환으로 문맹자들에게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공모한 작품이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언문을 읽고 쓸 수 있는 자를 15.44%로 밝혔고, 전체 문맹율을 77.74%로 밝혔다. 그러나 지방 간의 조사에서는 강원과 전남의 경우 80%를 상회하고 있다.
전승사설은 2행이지만 여기에서는 2행이 더 해졌고, 2연에서 구체적으로 전승 후렴을 자기동일화 확보를 위해 사용했음은 물론 주제가<아리랑> 곡조를  곡보로 했다. 당시 인구의 80%가 문맹자였다고 하는데,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조선일보>의 판단은 80%의 문맹자들 까지도 아리랑 가락은 알고 있다고 본 것이 된다.
역시 앞의 종두선전가와 같이 문맹층에 까지 일반화 된 아리랑 가락의 인지도를 활용 한 선전 자료로 본조아리랑의 일반화와 전국화를 보여준 것으로 본다.

▷ 아리랑망향가
만주벌 묵밭에 무엇보고 우리옥토를
떠낫거나
언제나 언제나 돌아가리 내나라 내고향
언제가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압록강건널 때 지은눈물 아직도 그칠줄
모르노라
언제나 언제나 돌아가리 내나라 내고향
언제가리

밤마다 그리운 코고무신은 백두산 마루를
넘나드네
언제나 언제나 돌아가리 내나라 내고향
언제가리

1931년 일본의 만주 점령으로 총독부의 정책적 독려에 의해 만주지역으로의 집단 이주(移住)가 이뤄졌다. 소작쟁의(小作爭議) 등의 갈등과 각종 수탈을 피하기 위해, 특히 3년간의 개척 후에는 개인에게 불하한다는 총독부의 선전에 단봇짐을 쌌던 것이다. 그러나 만주의 상황은 선전과 달랐다. 일제는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 등에서 동포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기여했음을 알고 이를 보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각종 갈등을 야기 시켜 통제권에 있게 했다. 이는 국내에서의 수탈과 피수탈의 구조 그대로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동포사회의 여러 아리랑에 형상화 되었다. 이 망향가도 그 하나인데, ‘만주벌 묵밭’과 ‘우리 옥토’를 대비하여 농민 수탈상을 구체화했다. 이 ‘묵밭’은 당시 여러 민족사적 수난상을 내포한 말이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상황을 아리랑이 수용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아리랑이 이미 동포사회에서 공시매체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굳이 곡명에서 ‘아리랑’을 쓴 것이나 후렴을 그대로 쓴 것 등은 이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음의 온천 선전가 역시 아리랑의 일반화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수안보온천 선저가(水安堡溫泉宣傳歌)
(其二 아리랑曲)
聞慶의 새재를 넘어스면
忠北의 靈泉인 수안볼세

울창한 松柏은 둘러싸고
따뜻한 溫泉은 풍풍솟네

정든님 뫼시고 이 온천하며
鳥嶺의 옛일을 차저보자


?글을 쓴 김연갑님은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로 평생을 아리랑과 함께 살아왔다. 아리랑하면 김연갑을 떠올리듯 그의 삶은 아리랑과 함께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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