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4:13, Hit : 513, Vote : 77
 2005-08-26 중국 이주민의 자화상, 아리랑 153호

중국 동북지방에 조선인들이 거주하게 된 것은 여러 이유에서일 테지만 결정적인 대량이주의 원인은 일제가 제국주의 세력을 확장을 위해 <재만조선인 지도요강>을 마련하고, '낙토만주'(樂土滿洲)라며 <만주개척단>을 조직해 3년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 개인 소유로 해 준다는 유인책에 의한 것이다. 민족 내부의 모순으로 비롯된 갈등, 높은 소작료와 동양척식회사의 토지 수탈로 이농인의 급증, 그리고 흉년으로 굶주림을 참다 모한 이들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만주의 황야로 살길을 자처 남부여대로 떠나" 살길을 찾아 정착한 곳이 간도지방이다.
바로 지금의 연변지역이다. 길림성 동쪽에 위치한 전체 4/1 정도의 넓이로, 중국 내에 우리 동포(조선족)가 57% 살고 있다. 36년간의 항일투쟁의 거점으로 전초기지여서 '여기에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반은 독립군'이라고 말 할 만큼 민족수난사의 중요한 역사 현장이다.

해방후에 중국과 북한 간의 관계와 지역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그리고 동포들이 중국군에 편입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 북한과는 '조국'의 관계를 맺어 왔으나 남한과는 중국 쪽의 관계에서나 북한과의 관계가 중첩되어 적대관계로 살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중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교류가 시작되어 이제는 직항로가 생겨 매일 비행기가 오가는 정도로 자유로운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박경리 소설 <토지>를 통해서만 상상하거나 일본 사진작가의 화보집을 통해서만 알게 된 동포들의 삶을 이제는 큰 제한없이 오가며 알고 사는 사이가 되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서로는 이의 없이 동질성을 확인했고, 그 동질성의 가장 구체적인 인자가 바로 '아리랑'이라는 사실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는 1920년대의 시대정신과 민족문제를 형상화 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과 박승희 원작의 연극<아리랑고개>에 의해 민족의 이름으로 회자될 때 '민족화한 아리랑'을 담보짐에 마치 조선인의 존재 증명처럼 넣어 껴안고 갔던 것이다.
더욱이 나운규가 명동촌에 일시 거주했던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본 세기 20년대 조선반도를 뒤흔들며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던 유명한 영화 한부가 있다. 이 걸작이 바로 당시 조선민족 고난의 역사를 진실하게 반영하여 영예와 찬양 속에 전해내려 온 <아리랑>이다." (백민성, 유서 깊은 명동촌, 연변인민출판사)이라는 동병상련의식으로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남녀로소, 상하귀천 없이 부르고, 들어도 싫지 않은...."(리수련, 격월간 <문학과 예술>,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국, 2004)노래로 특별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주제가 <아리랑>이 국내에서 보다 더 특별한 정조와 의미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이런 배경에서 1940년대 광복군의 활동에서는 가극형식의 아리랑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중경에서 활동한 <한국청년전선공작대>의 무극(舞劇) <아리랑>이 그것이다.1940년 5월 22일부터 서안 <남원문실험극장>에서 막을 올린 전 4장의 집체극으로 동포들의 민족의식이 담긴 작품이다. 그래서 험하고 장구한 세월 동안 짓밟아도 되살아나는 민들레처럼 쇠심줄만큼이나 질기게 눈물로 부르고, 웃음으로 부르고, 오늘도 잊지 않고 부르는 것은 물론 걸어온 역정과 오늘의 고개를 넘어가는 미래상을 담고 보태어 새롭게 만들어 불러 왔다. 그러니 중국 동포사회의 아리랑은 곧 재중 동포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가장 많은 아리랑을 부르는 제3의 민족문화권

과연 중국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어떤 의미로 불렸을까? 이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독립군 활동상의 일단으로 <중국민족학교> 황유복교수의 1986년 ≪중국의 한인들≫이란 저술에서 인용 한 글이다.

"일본 관동군 '토벌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선다. 앞장에 선 '길 안내자'는 흰옷을 입은 조선족 노인이었다. 주위의 산봉우리를 둘러보던 노인은 목청을 뽑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이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미구에 노인은 일본 군인의 군도 아래 쓰러지고, 포위망에 늘인 항일유격대들의 분노의 총소리는 노인이 못다 부른 아리랑의 노래가락을 이어갔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널리 알려진 항일투쟁 이야기이다."

이 내용은 연변의 대표적인 원로 작곡가 김관봉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1955년부터 10년간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는데 중국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 1966 ~ 1976)이 들이닥쳐 그간 알게 된 사실들을 입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2005년 4월 12일 연길 정암촌 답사에서 증언한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노인을 왜놈 토벌대가 들이닥쳐 빨치산을 대라고 하며 끌고 갔는데, 노인은 약속한 장소로 가서 의연하게 아리랑을 불렸다말입니다. 그것은 신호입니다. 그런데 유격대들은 노인이 그 앞에 있었기 때문에 기관총을 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계속 부른 것이었어요. 내 뒤에 왜놈들이 있으니깐 쏴라 나는 죽어도 된다. 이런 신호였지요. 결국 노인이 제일 먼저 죽고, 그 뒤에 있던 왜놈들을 모두 몰살 시킨 것이지요. 그러니 아리랑은 처절한 왜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1930 ~ 1940년대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은 재만 동포사회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약품이나 무기나 식량 조달은 물론 정보를 얻는데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재만 동포들과 항일 독립운동 전선의 독립군이나 그부대와는 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간파한 일본 토벌대는 첩자를 두는 등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동포들의 피해는 전선과 매 한가지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아리랑은 투쟁의 한 무기가 된 것이니 바로 암호로 불렸던 것이다. 일본 토벌대와 독립군들과의 처절한 투쟁에서 아리랑이 그런 역할을 한 것으로 이는 이후 북한 불후의 고전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나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 하라>에서의 아리랑으로 형상화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 동포사회의 아리랑 상황은 어느 동포사회 못지않게 중첩된 의미로 존재함은 물론 특히 항일의식의 표방으로 이웃한족에게 자랑스러운 노래로 내세워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 연변지역의 동포사회는 남과 북의 문화와 중국 문화와의 융합을 한 특이한 제3문화권으로 통일문화에 대한 많은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2005-09-29 DMZ(비무장지대) 와 아리랑 154호
2005-04-23 아리랑의 선전·계몽가로의 활용 149호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