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7:04, Hit : 495, Vote : 77
 2006-11-10 주제가는 누가 먼저 어떻게 불렀나? <166호>

- MBC의 보도에 대한 반론-(1부)

10월 1일 9시 뉴스에서 김연실의 아리랑 SP음반 발굴 보도를 하면서 이를 주제가<아리랑>의 최초의 음반이라고 했다. 이는 잘 못된 보도라는 주장이 있다. 이를 계기로 주제가<아리랑>의 확산 경로를 2회에 걸처서 살펴본다.

1926년 10월 1일 종로 3가 극장 단성사에서 오후 6시에 개봉되어 5일간 상영된 영화<아리랑>의 주제가는 어떻게 확산되었나? 즉, 누구에 의해 불렸고 어떤 경로로 확산되어 신민요로, 유행가로 유행하게 되었는가의 문제로, 확산 경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단성사에서의 개봉이 성공하였음으로 그 결과로 주제가도 유행의 계기를 맞은 것이지만, 주제가는 영화와는 또 다름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 이글에서는 바로 주제가<아리랑>이 독자적으로 또 다른 길로 확산된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당시는 무성영화 시대이니 상영 때마다 뮤직박스(music box)의 반주에 따라 변사가 때로는 가수가 직접 출연해 주제가나 삽입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는 고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개봉관을 떠나 지방과 서울의 재상영 때 마다, 극장마다, 지방마다 그 변사가 다르고 가수와 그 몫이 달랐다. 그래서 변사가 누구이냐와 가수의 출연 여부가 달랐다. 또한 영화의 유명세로 다투어 다양한 장르로 음반화되어 단순하게 단편적인 신문기사나 방송 기록 또는 음반 자료로는 그 경로가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재상영이 전국적이었고 그 기간이 30여년이란 장기간이었기에 특히나 그렇다. 그러나 아리랑의 전 역사에서 이 주제가가, 이 시기에 그 위상을 담보 받았다는 점에서 이의 규명은 필요한 것이다.

  주제가<아리랑>의 확산은 음반, 방송, 인쇄 매체를 통해서이다. 이를 정리하면, 우선 상영 중에 주제가를 부른 가수에 대해서인데, 두 가지 상황이다. 하나는 개봉 당시이고 두 번째는 재상영 때이다. 전자는 1926년년 10월 1일에서 5일 사이의 단성사에서 부른 경우이고, 후자는 전국 지방 극장과 서울의 단성사 등에서의 경우이다.
이 때 노래하는 이의 위치는 정해져 있었다. 바로 변사석 옆에 4~5인조의 밴드가 자리하는 뮤직 박스가 그 지정 위치인데, 여기서 변사의 지시나 대사에 맞춰 노래를 하게 된다.(물론 막간 가수의 노래나 연주는 무대 중앙에 올라 하게 된다. 일부 증언에 “홍난파가 아리랑을 깽깽이로 했다.”는 경우가 그렇다.) 개봉관  <단성사>에는 이경실이 어린 나이의 가수로 주제가를 불렀다. 그리고 재상영 때는 이미 가수로 알려진 이정숙(李貞淑)이 불렀다. 신일선 여사의 증언에는 영화<낙화유수> 상영 때도 무대 밑에서 직접 주제가를 불렀다고 한다.

다음은 영화와는 별도로 음반에 의한 상황이다. 이 경우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영화설명’(映畵說明), 그러니까 변사의 해설을 요약하여 음반화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주제가<아리랑>만을 가수가 음반화 한 것이다. 이 때는 ‘영화소곡’(映畵小曲) 또는 ‘영화소패’(映畵小唄)라는 장르 표기를 하기도 했고, 이런 표기 없이 ‘아리랑’ 또는 ‘신아리랑’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들 음반을 이용한 방송에 의한 확산이다. 그런데 이때의 실연이기 보다는 음반 자료를 이용한 것이기에 당연히 그 선후가 분명하여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영화설명 상황은 먼저 당시 영화<아리랑>과 관련한 변사를 살펴봐야 한다. 변사는 단성사 개봉 당시와 1928년 이후 재상영 때가 다른데, 개봉 때에는 단성사 소속의 서상호가 했고, 이후는 1928년 데뷔한 성동호가 주로 맡았다. 1930년대 방송 활동 등으로 가장 유명한 변사이다. 그리고 신문사 주최의 <독자 감상회>나 <찬영회> 주최의 특별행사 같은 데서는 영화감독 이경손 등이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중에 영화설명의 음반을 낸 것은 성동호 뿐이다.

영화설명의 첫 번째 음반화는 1929년 2월, 콜롬비아에서 발매된 <향토비극 영화설명 아리랑>이다. 이의 해설자는 성동호이고, 이 음반에서의 노래는 유경이(劉慶伊)가 불렀다. 반주는 <조극관현악단>과 <광월단>이다. 이 때는 2장으로 총 12분 정도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32년 니폰노홍 레코드에서 성동호 설명에 주제가는 강석연(姜石燕)이 네 장의 음반으로 발매했다. 그리고 1934년 6월에 콜롬비아에서, 다시 리갈 레코드사에서도 발매했다.

다음은 주제가만을 독창으로 음반화 한 경우이다. 이 경우 제일먼저 취입 한 이는 채동원(蔡東園)이다. 채규엽으로 더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 전문직업 가수 1호라는 유명한 남성가수인데, 콜롬비아레코드 6회 신보(콜럼비아 제6회 신보, 조선일보, 1930, 2, 7)에 의하면 1930년 1월에 ‘유행가 아리랑’으로 발매되었다.  콜럼비아 관현악단의 반주로 불렀지만 초기 창가 창법처럼 음조의 경직성이 느껴져 완숙한 유행가 창법의 노래는 아니다. 민요조도, 그렇다고 유행가조도 아닌 주제가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이 음반 뒷면에 영화 주제가<세동무>가 수록된 점과 이 음반 발매를 알린 6회 신보에 수록된 이진봉의 ‘긴아리랑’이 그 장르를 ‘잡가’(雜歌)로 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채동원이 부른 아리랑이 영화의 주재가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세동무>가 수록된 것은 함께 수록된 아리랑도 같은 영화의 주제가임을 알려주는 것이고, 신보에 ‘긴아리랑’은 서도잡가라고 한 반면 아리랑은 유행가라고 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유행가로 일반에게 인식되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김연갑/ 국가상징연구회 연구위원




2007-09-14 주제가는 누가 먼저 어떻게 불렀나? 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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