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8:25, Hit : 553, Vote : 81
 2007-09-14 아리랑, 세계 뮤지션들과의 조우(下) 172호

최근 국가 정책방송 <아리랑TV>가 문광부 제정 ‘한국100대 상징’ 보급 활동의 하나로 아리랑 주제 프로그램을 연이어 방송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리랑은 무었인가?’, ‘무었이 아리랑인가?’를 화두로 20부작을 제작, 방송 중이다. 이 작업에 자문을 하면서 아리랑이 세계 속에 어떻게 전파 됐는가를 되집어 보게 되었다. 이에 아리랑이 세계 음악인들과 어떻게 만났는지를 2회에 걸처 정리하기로 한다. 이 글은 지난 호에 이어 필자가 집필한 2005년 국악방송 <아리랑의 재발견>(방송대상 수상작) 제3부 -세계 속의 아리랑-과 출간 예정인『아리랑의 세계』에서 일부를 축약한 것이다.

  36년간의 일본강점으로 부터의 해방과 3년간의 한국전쟁은 외국의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 풍속의 하나로 아리랑이알려지게 되었다. 다음 네 가지 형태로 확인되는데, 주로 1945년 해방직후의 상황을 예로 들어본다.
하나는 한국의 상징(symbol)으로 이해한 경우다. 직접적으로는 한국의 해방정국에 참여한 미국과 군인들, 그리고 한국전에 참전한 참전국과 군인들에 의해 수용된 경우로 예를 들면, 1945년 8월 미 제7사단 진주군의 일원으로 내한했던 게인이 귀국하여 파라마운트사 소속 배우가 되어 아리랑을 취입하려 했다는 것이다. UP통신의 크레플러 기자의 보도로 알려졌고, 우리나라에서는 11월에 자유 신문의 보도로 알려졌다.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민요 아리랑에 시대의 각광―슬퍼도 부르고 기뻐도 부르는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멀리
태평양을 건너가 미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부르고 있거니와 이번에 미국의 유명한 영화배우를 통하여 널리 소개되리라고 한다. 즉 <유·피>기자로 서울에 파견되어 있는 크레풀러 씨(氏)의보도에 의하면 미국 <파라마운트> 영화회사 전속 ‘떤 게인’이라는 희극배우가 이번 제7사단 병정으로 들어와 있든 중 이 노래를 듣고 여러 가지로 착상을 하야 그 곡조와 가사 전부를 모아 가지고 갔다는 바 이 희극배우의 눈에 비친 조선의 정서와 그의 귀에 들려진 이 노래는 어떻게 미국 전토에 펼칠지 흥미 있게 기다리고 있다한다”

그리고 역시 미 제7사단과 관련된 것으로, 한국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미 제7사단이 사단가 ‘대검가’(大劍歌)를 아리랑 곡조로 했다는 사실이다.
아리랑이 미 제7사단의 사단가가 된 경위는 일설에 의하면 1950년 음악인 이흥산이 작곡한
<아리랑행진곡> 악보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주둔 기념으로 1956년 4월 18일  줄. W. 켈러웨이 사단장 이한식(離韓式)에서 기증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1916년 하와이에서 창설되어 1943년 아류산 열도에서 일본군의 축출하고, 2차대전 마지막 전투를 오끼나와에서 했고,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진주하여 총독부 청사 게양대의 일장기를 끌어내린 해방군이며, 이후 1949년 까지 점령군의 임무를 했고 미 제11공수사단과 임무를 교대, 일본에 갔다가 1950년 10월 19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9. 28 서울 수복과 혜산진 점령, 압록강에 깃발을 꽂아 명성을 날린 부대로서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이후 이 7사단 26개 부대는 23년 10개월 간 동두천에 주둔하다, 197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마리나시(市)에 이주, 주둔하게 되었다.

  이 같은 경위에 대해 해석에 따라서는 음악이 정치·군사적으로 활용된 경우로 마뜩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리랑의 확산 현상과 한미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서, 또한 아리랑이 역사의 노래라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한편 우리스스로가 해외에 나가 알린 경우가 있는데, 전쟁 직후 전쟁고아들로 결성된 합창단이 해외에 모금성(募金性) 공연에서 아리랑과 부채춤을 선보여 알린 경우이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음악으로 전했다는 경우로 이 경로 역시 유쾌한 경로는 아니다.
이러한 해방직후의 상황과는 다르게 70년대에 와서는 다른 성격으로 아리랑이 외국에 알려졌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경제활성으로 외국 공연자들이 내한 공연을 갖게 되면서 부터이다.

확인되는 음반들로 대표적인 것이 1973년 내한 공연을 한 세계적인 가수 냇킹 콜의 실황 음반에 아리랑이 수록된 것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1976년 편곡, 음반으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작품이 된 프랑스 폴 모리아의 ‘아리랑’이다. 이는 1975년 12월 첫 방한 공연 때 아리랑을 접하고 두 번째 방한과 함께 발표한 작품이다. 이는 편곡자인 폴 모리아가  '편곡의 마이더스’로서 세계적인 편곡자인 만큼 아리랑 역시 그럴 것이라는 기대 정도는 했지만 결과는 너무나 놀라웠던 것이다. ‘경쾌한 현대조의 8박자와 유럽 스타일의 전통적인 기능화성 결합’이 폴 모리아의 특징인데, 바로 ‘아리랑’이 딱히 그대로 적용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반응은 세계적이었다. 그래서 1976년 앨범의 타이틀이 <Arirang Miracle>이 되었다.
이로써 그의 대표작인 <Love is Blue>의 반열에 올려놓아 그야말로 아리랑을 세계화 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중반으로부터 세계적인 유명 음악인들이 방한하여 공연에서 부르고 일부는 음반화가 이뤄져 본국에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이외 아리랑을 주요 레퍼토리로 하여 연주하는 이들은 하와이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인 렌 파울로, 그리스의 나나 무스크리, 독일의 그룹 만토키와 디에터 일(Dieter Ilg)과 살타첼로(Salta Cello), 헝가리의 에바션, 호주의 시로코(siroco)민속음악단, 성악가 안드레아 숄,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 작품 등은 돋보이는 예들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일본의 혼성 두엣 ‘훼이 로브스키’나 재즈 팀, 또는 후리 뮤지션들이
아리랑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것도 주목을 하게 한다.
  그런데 이상의 연주자들은 단순히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이기 때문에 의례적으로 연주한
것이 아니라 ‘아리랑’에 음악적인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이다. 한 예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George Winston)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이를 입증해 준다.


  “미국에서 콘서트 투어를 할 때 항상 이 곡(아리랑)을 연주한다. ‘아리랑’은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전통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블루스적인 느낌도 들어있고,  문화나 국가를 초월한 감성이 깃들여 있는 곡이다.”


  음악성을 든다면 몽골의 흐미(Hoomii) 창법에 의한 아리랑과 독일의 저명한 기타리스트 지그프리트 베렌트(Siegfried Behrend)의 반주로 여가수 벨리니(Belina)가 부른 아리랑을 꼽는다.
전자는 몽골 서부 알타이 지역에서 시작된 음악으로 자신들이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나태려는 노력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한다. 다양한 음색과 발성에 의한 성음은 뱃속 깊은 곳의 소리를 목청과 혀로 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창법으로 아리랑을 자연스럽게 소리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리랑의 음악적 보편성을 말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음악성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연주자와 가수가 음악성을 발휘하여 불렀기때문이다. 지그프리트 베렌트는 독일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로 윤이상과 펜데레츠키가 작품을 헌정(獻呈)할 만큼 음악성을 인정받아 왔다. 이 후 윤이상의 헌정에 보답하는 뜻으로 이 아리랑을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아주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작품이다. 그것은 바로 1976년 북한의 최성환이 작곡한 <관현악아리랑>이다. 북한의
작품이지만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다. 왜냐하면 1970년대 말 당시 중앙정보부가  입수, 검토한 예에서부터 2000년 6. 15 정상회담의 공식 의전(儀典)음악으로 연주되고부터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나 동구권 쪽의 친북 나라에서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편성은 양악기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민족 악기(개량악기)를 포함, 편성한 배합관현악곡이다. 이는 북한의 주체음악 이론의 대표적인성과이다. 그런데 작곡(편곡) 자체가 완벽하고 폭이 넓어 국악기와 양악기에 의한 배합이 조화를 이루고, 다양한 국적의 지휘자에 의한 지휘에도 이질감이 없이 자연스런 해석이 가능했고, 보편적인 음악적 성향으로 하여 무한한 표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으로서도 나름대로의 지위를 두고 자랑하고 있다.


  “민요 <아리랑>은 우리시대에 와서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현명한 영도와 세련된 지도에 의하여 관현악곡아리랑의 소재로 쓰임으로써 주체적 음악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민요 <아리랑>을 소재로 한
관현악곡은 우리 인민들의 오랜 역사적 과정의 생활감정과 민족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악기 편성에서도 민족적 색깔이 독특한 죽관 악기를 위주로 하고 거기에 양악기를 배합함
으로써 우리 인민들의 비위와 정서에 맞는 음악형상을 창조하고 있다.”


평론가 최성률이
쓴 위의 글에서는 내부적인 악기 개량과 배합연주의 성가를 강조하며 ‘인민들의 비위와 정서를’ 위하여 재창작했다고 밝혔다. 어쩌면 이러한 소박한 목적이 오히려 작품성과 고유성을 인정받아 세계적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작품은 우리 아리랑의 음악성을 세계에 알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사)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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