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1:07, Hit : 498, Vote : 83
 2003-04-01 민요 “아리랑”과 영화 124호

춘사 나운규 탄생 1백주년 기념 자료전

1990년 단일팀 단가(團歌)와 단기(團旗) 그리고 호칭(呼稱)을 논의했던 남북 체육회담에서
북한은 단가를 아리랑으로 하자며 그 단서로서 “1920년대 아리랑”을 제안 했다.
이 때 이미 몇 차례의 단일팀 논의 시에 아리랑이 제안되었고 우리 측도 아리랑으로
제안한 상태여서 이 제안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합의 이후 단가는 남측이,
단기는 북측이 제작한다는 합의에 따라 실제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제작하려다 보니 북측이 제시한 “1920년대 아리랑”이 어떤 것인지가 문제로 제기 되었다. 어떤 곡조의 것인지, 그것을 제안한
저의는 어디에 있는지가 궁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자들 간의 몇 번의 모임과 웍-숍 후에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즉 북한은 나운규감독의 영화 <아리랑>의 항일성을 내세워 민족영화 1호로 꼽고 있으며,
개봉된 1926년이 ‘타도제국주의’ 이념을 확립한 해로서 북한 현대사의 기점으로 기념하는 해이다.
그래서 이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도 중시하여 단가로 제안 한 것이다. 영화의 주제가로 탄생하여 모든 아리랑의 상징으로 위상을 얻은 이아리랑,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서울아리랑’ 또는‘경기아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1990년의 단일팀 단가 합의는 43년 판문점 회담 역사에서 유일한 동일안(同一案)제의,
합의라는 기록을 갖고 있으니 참으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아리랑은 단일팀 ‘Korea’의 단가로서 국제적으로는 국가(國歌·national hymn)의 기능으로 연주되게 되었으며,
미래 통일국가(統一國家)의 국가(國歌) 제일안(第一案)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아리랑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로 일시적이긴
하지만 아리랑에 대한 붐을 일게 했던 것이다.
아리랑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자가 2명, 석사 학위 소지자가 10여명이나 배출 되었고,
연구서와 관련저서가 20여종, 아리랑주제 가요음반도 10여종이나 발매되었고, 뮤지컬·창극·연극
등 무대 종목 작품이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리랑의 종류가 50여 종에 노랫말이 4천여수가 되고 그 전승 범위가 남과 북은 물론 해외 127개 동포사회라는 사실 등도 밝혀졌고, 태국에서 유유타라는 이름으로 살던 노수복 할머니 같은 정신대원들과 수잔 브링크양(孃) 같은 입양아들이 우리말은 잊었어도 아리랑만은 부르고 있음이 알려져 실로 아리랑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연대와 대동의 노래임을 실감하게 했다.
그런데, 이러함에도 아리랑에는 숙제가 남겨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선아라리와 같이 지역 전통 아리랑은 그 음악적배경과 전승 체계 등이 집중적인
연구로 밝혀졌음에 비해 정작 너무나 가깝게 부르고 있는 소위 ‘경기아리랑’(주: 주로 경기명창들이 부르고 경토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이 어떻게 오늘의 위상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것을 기층음악적 전승체계를 갖고 있는
전통 민요로 알고 있는가 하면, 심하게는 모든 아리랑의 역사적, 음악적 원조라는 의미로
‘본조아리랑’이라고 불러 오기도 했던 것이다.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바탕자체는 전통 아리랑에 기반을 두었지만 분명히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으로서 작사와 편곡자가 있는 일종의 창작 민요로 일종의 유행가인 셈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이 주제가로 채택되게 된 배경과 작사·작곡(편곡)자가 누구인가를 북한 발행 자료 등에서 실마리를 찾아 이 문제를 풀어가 보기로 한다.

1) 민요 아리랑과 나운규

과연 나운규는 어떤 계기로 민요 아리랑을 접했고, 어떤 경로를 거쳐 영화의 소재로 채택 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주제가로 확대 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은 체계적인 민요 조사 자료가 없는
우리로서는 하나의 민요가 어떤 경로를 거처 확산, 전승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일 수도 있지만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오늘의 ‘경기아리랑’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먼저 나운규의 직접 진술을 통해 이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가 보자.

“문 -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날 넘겨주오. 하는 이 노래는 누가 지었어요? 한동안은 그것이 벌써 10년은 되었지만 그때 서울이든
어디서든지 어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즐겨 부르던 ‘아리랑’의 이 주제가를 누가 지었어요?
답- 내가 지었소이다. 나는 국경 회령(會寧)이 고향으로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淸津)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 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래 소리가 들리면
거름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읍조려 보았답니다. 그러다가 서울 올라와서 나는 이 ‘아리랑’ 노래를 찾았지요. 그때는 민요로는 겨우 강원도아리랑이
간혹 들릴 뿐으로 도무지 찾아 들을 길이 없더군요. 기생들도 별로 아는 이 없고 명창들도 즐겨
않고,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이 대담 기사는 1937년 1월에 월간잡지 <三千里>에 게제된 것이다. 개봉으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의 진술인데 비교적 우리의 의문에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줄만하다. 이를 논점별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① 아리랑을 인식하고 들은 시기는 소학생 때로, 1911년부터 1914년 사이다.(주 : 철도박물관 담당자 )
그러니까 10세 이후의 소학교 상급생 때이다.
② 듣게 된 계기는 하교길인 청진-회령 간 철로 공사 구간의 작업 인부들로부터다.
③ 기억하는 정조는 구슬프나 애련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일부러 듣기도 했다.
④ 1925년, 24세 때의 서울에서는 ‘강원도아리랑’은 들을 수 있었으나 회령에서 들었던 아리랑은 불리지 않았다.
⑤ 주제가로 쓰기 위해 가사는 직접 작사를 했고, 곡은 <단성대악대>에 의뢰, 편곡 하게 했다.
                                                  
                                                - 다음 호에 -  




2003-04-01 《song of ariran》 125호
2003-04-01 나는“북한아리랑 축전”간다. 117호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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