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 - 국악신문



  기미양(2010-11-26 14:51:44, Hit : 539, Vote : 91
 2003-04-01 126호 - 124호 이어서

①은 청진 - 회령 간 철로가 개설된 것이 1911년부터 14년 까지였으니 9세에서 12세 대에 들었다는
것이고, ②와 ③은 아리랑을 들은 정황과 감상을 피력한 것이다 그리고 ④와 ⑤는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는 과정을 말한 것이다. ②와 ③의 정황과 함께 주제가 아리랑이 성립되는 과정에서는 주목되는 대목이다.
먼저 ②와 ③의 논점을 살피면 이렇다.
즉 당시 나운규가 들었던 그 아리랑은 과연 어떤 것이냐하는 문제인데, 제시된 정황상으로는 “강원도아리랑”과 나운규가 귀를 기울여 들었으니 고향인 회령이나 이웃 청진에서 불려지고 있던 아리랑은 아닌 것이 된다. 또한 1914년부터 1925년 사이 적어도 나운규의 주 활동 범위인 회령·부산·서울에서
통속화 되어 널리 불려지는 아리랑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아리랑은

어떤 것일까?
지금까지 조사된 문헌과 전승 상황으로 보아 1911년에서 1925년 사이에 불렸다고 보는 것은
정선아리랑(주 : 당시의 명칭은 ‘정선아라리’·‘정선구아리랑’·‘강원도아리랑’일 수도 있다.)과
1894년 5월 청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일본 <우편호우지신문>이 기록한 ‘아라란’과 H·B. 헐버트가 채록한 ‘A-RA-RUNG’(주 : 1896년·
KOREA REPOSITORY KORIA VOCAL MUSIC 이 자료에는 한글 표기로는 ‘아르랑’이나
영어표기에는 ‘a-ra-rung’이다), 그리고 李尙俊이 채보한 것 중의 하나인 ‘아르렁 타령’이다. (주 : 아리랑을 採譜한 이상준의 저서는 1914년 발행한 <朝鮮俗曲集 上>과 1921년 발행한 <新選俗曲集>
그리고 1921년에 발행한 <新撰俗曲集>으로 재판은 1926년이다. 그리고 1929년에 발행한
<朝鮮俗曲集 下>가 있다. 여기에서는 1921년판 까지는 명칭을 ‘아르랑’ 타령이라 했고,
이후는 ‘아리랑타령’이라고 했다. 이 악보집에는 ‘강원도아리랑’도 채록되어 있다.)
이 중에 일본 기자가 기록한 것은 노랫말 3절 뿐이고 악보는 없다. 그러므로 두자로만 살피기로 한다.
헐버트 목사가 경기도 일원 한 포구에서 채록했다고 한 아리랑의 노래말과 악보는 다음과 같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
아르랑얼싸 배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개 방망이로 다 나간다(주: 현대로 표기)

다음은 이상준이 채록한 악보와 노랫말이다. 노랫말 1절은 위의 자료와 같다. 그런데 후렴을 별도로 표기한 것과 2절의 노래말을 채록한 것은 18년이란 시차와 한국 음악인에 의한 채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렁 타령>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께방망이로 다 나간다

후렴
아르렁아르렁아라리오
아르렁 띄여라노다가게
남산위에 고목나무
나와 같이만 속썩는다

18년의 시차로 채보된 두 자료 간에는 민속음악의 속성에서 보여지는 차이를 감안한다면 같은
것임을 알게 한다.
다만 채록 상황의 차이와 외국인이라는 기록자의 인식차이가 보여질 뿐이다. 이러한 정황이고 보면 나운규가 회령에서 들었던 아리랑이 바로 이것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번에는 ③과 ④의 논점을 확인 해본다. 이는 나운규 본인의 증언과 선배 영화인 이경손 감독과 친구 윤봉춘의 증언 그리고 북한의 기록을 살피기로 하는데, 나운규가 <아리랑>을 주제로 영화를 기획한 동기에는 세 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윤봉춘에 의한 주장으로 1923년에 서양 영화를 보고 힌트를 얻었다는 것으로 (주 : <나운규 일대기>·유봉춘·<영화연극>·1939년 4월호) “군의 말에 의하면 <아리랑>은 제작하기 잇해 전에 어느 서양 영화를 보고 힌트를 얻어서 생각해낸 것이 이 <아리랑>이라고 하였다.” 는데에 근거한 것이다.
다음은 이경손의 주장으로 아리랑 시구에서 발상을 얻었다는 것으로 공연예술사가
김종욱의 글에 “이경손 감독의 시작 노트에서 ‘아리랑’이라는 민요시 1편을 축출해 낸 것이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이렇게 해서 소재는 자기의 선배인 이경손 감독에게서, 작품집필은
자기 손으로 쓴 것이다.” (주 : 김종욱의 글 <영화 아리랑 원본은 이것이다> · 66쪽)에서 근거한 것이다. 이 내용은 이경손의 다음 글에서도 제기된 것이다.
“운규는 그의 <아리랑>이 나의 민요 <아리랑>(노트)에서 암시 받았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운규의 <아리랑>은 철두철미(徹頭徹尾) 운규 자신의 창작품이었다.
비록 사소한 어구(語句)나 어떤 암시, 또는 기술상으로 나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런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한 문제 거리도 아니었다” (주 :  <신동아> ·이경손 ·1964년·12월호)
그런데 이 글은 앞에서 나운규의 직접 증언을 통해 확인한 바 있듯이 이미 어린시절
철도 노동자들에게서 아리랑을 들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영화를 기획하던 중 이경손의 노트에서 민요시 1편을 축출하게
되면서 비로소 머릿속에 잠재해 있던 것을 구체화 하는 계기를 맡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두 글은 상호 보완적인 내용으로 사실로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북한에서의 이에 대한 주장을 살펴본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관련된 증언으로 볼 만하다.
최근 북한이 나운규 탄생 1백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라운규의 수난기 영화> (주 : 최창호·홍강성 공저·평양출판사·1999년)에 <민요 아리랑을 예술적 소재로 선택하여>란 부분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라운규가 <아리랑>을 취급 대상으로 선택하고 여기서 주제를 돌출해내려고 하였던 것은 <아리랑>이라고 하는 어원(語源) (주 : 북한에서의 아리랑에 대한 어원설은<북한아리랑연구>(2002·청송출판사·김연갑)에 요약정리 되어있다)과 어의(語義)를 일제통치시기 우리민족의 슬픔으로 연결시키고 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위의 76쪽) 이상의 주장은 앞의 주장들 보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운규의 사상성에 근거를 두었다고 보는 것으로, 다분히 <아리랑>의 항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그렇다면 이상의 주장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이는 정황으로 보아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나운규는 “소학교 상급학년 때 고향에서 외지 철도노동자들이
부르는 ‘아르랑’(당시 문헌 표기)을 감명 깊게 들었고, 10여년 후 서울에서 영화를 기획할 때 마침 선배
이경손의 노트에서 아리랑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보고 과거에 들었던 아리랑의 감상을 되새겨 ‘아리랑’이란 제명과 주제로 결정, 외국영화에서 본 명장면의 기법 등을 적용하여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주제곡의
가사를 직접 짓고, 곡조는 ‘아르랑’의 정조를 <단성사악대>에 전해주고 편곡하게 하여 정했다.”고 본다.
                                                                             - 다음 호에 -  




2003-04-01 한 일본인의 『아리랑』觀 127호 26회
2003-04-01 《song of ariran》 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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