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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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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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음반해설]밀양아리랑-김연갑 기미양
                      嶺南 名物 밀양아리랑

1. 프롤로그-밀양아리랑(김수야)
2. 밀양아리랑-김경호· 신인자
3. 밀양아리랑-김경호· 신인자
4. 독립군아리랑-김종엽
5. 광복군아리랑-김종엽
6. 파르티잔아리랑-김종엽
7. 신밀양아리랑-김종엽
8. 통일아리랑-김종엽
9. 에필로그-대담(김경호·신인자/기미양)


함께한 이들

기획-신나라
글·구성-김연갑·기미양
사설정리-기미양
정보제공-서정매
녹음-
디자인-
제작-

창자-김경호(71세)/경남 밀양시 가곡동 주공아파트 103동 701호
    -신인자(70세)/경남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 711번지
    -김종엽(64)/ 극단<미추> 소속, 마당놀이 배우

제명-차상찬
제자-서예가***(남은혜 명창 제공)




                            嶺南 名物 밀양아리랑

                                               김연갑/(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기미양/벤쳐아리랑 대표



밀양아리랑은 우리나라 4대 아리랑(정선아리랑, 본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중 하나로 경상도적 투박한 첫 사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로부터 빠른 리듬과 내어 지르는 특성으로 하여 ‘탁월한 嶺南性’의 노래다. 이는 여러 아리랑 중 고유성을 갖는 속성이다. 물론 이 뿐만은 아니다. 1926년 음반(일축소리반, 밀양아리랑(卵卵打令), 박춘재 장고, 김금화 창, 『매일신보』)으로 발매되어 본조아리랑과의 동반유행은 해외 민족운동 진영으로부터 ‘역사의 노래’로 불리게 했다.

일제강점기 밀양아리랑을 독립적으로 다룬 1928년《別乾坤》8월호(통권22호)에 <密陽의 七大名物, 구슲픈 密陽아리랑>이란 차상찬(車相贊/1887~1946)의 의미 있는 글이 있다. 그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지방이던지 아리랑타령이 없는 곳이 없지만은 이 밀양의 아리랑타령은 특별히 정조가 구슬프고 남국의 정조를 잘 나타낸 것으로서 경상도 내에서 유명 할 뿐 아니라 지금은 전국에 유행이 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러나 수심가는 평안도에 가서 들어야 그 지방의 향토미가 있고, 개성난봉가는 개성에 가서 들어야 개성의 멋을 알고, 신고산 아리랑타령은 함경도에 가서 들어야 더욱 멋이 있는 것과 같이 이 밀양아리랑타령도 서울이나 대구에서 듣는 것보다 밀양에 가서 들어야 더욱 멋을 알게 된다. 특히 화악산(華岳山) 밑에 해가 떨어지고 유천역에 저녁 연기가 실낫같이 피어오를 때에 낙동평야 갈수통 속으로 三三五五의 목동의 무리가 소를 몰고 돌아오며 구슬픈 정조로 서로 받아가며 부른다.
이렇게 하는 소리를 들으면 참으로 구슬프고도 멋이 있고 운치가 있다. 아무리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라도 그 누가 길을 멈추고 듣고 싶지 않으랴.~“(중략)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섯달 꽃본듯이 날좀보소(후렴)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어얼시고 넹겨 넹겨 주소

네가잘나 내가잘라 거누가잘라
구리백통 은전지화돈잘났지

남의집 영감은  자동차를 타는데
우리집 문둥이는 콩밭만탄다

우리집 영감은 북간도갔는데
철없는 모판에 봄풀만났네“

마지막 사설은 1936년 길주 명천 부옥동에서 채록된 “ “일년 열두달 지은농사/ 북간도 갈차비 부족이라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세”와 상통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같은 해 대중공연에서 장일타홍에 의해 불릴만큼 유행을 했으니 사설상의 교섭은 있을 수 있다.)

이상의 사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많은 각편을 생산했다. 밀양 현지의 자료는 다음과 같다.
                      
                               밀양아리랑(3번트랙)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에 애화가 전해있네

                               (후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잘넘어간다

                                    저건너 대숲은 의의한데
                                    아랑에 슬픈넋은 애달프다

                                   채색으로 단청된 아랑각은
                                   아랑의 유혼이 깃들여있네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감돌고
                                    벽공에 걸린달은 아랑각을비추네

                                   송림속에 우는새 처량도하다
                                   아랑의 원혼을 네설워우느냐

                                    촉석루 아래에 남강물은
                                    논개의 충혼이 어려있네

                                   영람루 비친달빛 고교한데
                                   남천강 말없이 흘러만간다

                                   아랑의 굳은절개 죽음으로씻었고
                                   고결한 높은지조 천추에 빛난다

                                   아랑의 아랑각은 아랑넋을 위로코
                                   진주의 의암은 논개충절 빛내네

                                    팔각정의 영남루는 웅장한모습
                                    반공에 우뚝서 기관을자랑

                                    송운대사 비각을 구경하고
                                    경치좋은 표충사 들러나갈까

                                    영남루 남천강 아랑각은
                                    영남의 명성인 밀양의자랑

                                   박남포 여관의 사장구(설장구)소리는
                                   자다가 들어도 내낭군소리

이 시기 전후 차상찬의 글에서도 보았듯이 현지답사에 의한 기행문이거나 문헌을 바탕으로 한 논평이 아님으로 다분히 인상기적인 글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밀양아리랑 가창 방식과 구조의 특징인 첫 사설을 먼저 부르는 특징이나 ‘아랑의 애화∼’운운하는 사설이 아닌 ‘날좀보소···’가 불려진 점, 특히 이 시기 이런 정도의 밀도 있는 글은 어느 지역 아리랑이 갖지 못한 밀양아리랑이 획득한 유명세의 결과로 의미가 큰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음반이 발매된 2년 후, 밀양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행을 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는 점이 그러한데, 이는 역시 개봉 2년 후 인기의 극점에 있던 영화<아리랑>의 주제가(오늘의 본조아리랑)와 동반하여 유행했음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음반의 재발매 상황이나 방송 송출상황(1938년 JODK-조선방송협회 第二放送用 『歌謠集』에 밀양아리랑이 세 번째로 수록되어 그 유행상을 확인시켜 준다)과도 일치함에서 입증이 되는데, 영화<아리랑> 개봉 시 주제가 가사를 수록한 선전 전단지가 압수 당하면서 아리랑의 항일성이 더욱 강화되는데, 이러한 항일성에 동화되어서 밀양아리랑은 곡조의 경쾌함보다 저항성에 더 직접적인 방점을 찍게 된다. 이러한 밀양아리랑의 성향은 이 땅을 떠나 격오지(隔奧地)나 만주(滿洲) 등지로 단보짐을 지고 고향과 조국을 떠나는 이들 가슴에 담겨서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동포사회에 퍼져 나가게 된 배경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즉 민족사의 아픔을 두 아리랑이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항일민족운동 현장에서 함께 불려지게 되어 여타의 노래와는 변별되는 이른 바 ‘아리랑의 역사에의 의탁성향’을 역사화 할 수 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두 아리랑은 1920년대 항일운동 거점이었던 중국 민족운동 진영에서 ‘항일의 노래’라는 지위를 얻었고, 이 중 밀양아리랑은 <독립군아리랑>으로부터 임시정부 국군 광복군의 공식 군가 <광복군아리랑>까지 그 기능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이는 오늘의 ‘민족의 노래’라는 아리랑의 빛나는 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Ⅰ. ‘밀양에는 밀양아리랑이 없다?’  

  밀양아리랑이 역사의 노래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특정 지역에 귀속될 사항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미 ‘밀양의 민요(노래)’ 그 이상의 ‘민족의 노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현 당시의 ‘경남남도 밀양’이라는 에스닉(ethnic)적 곡명 ‘밀양아리랑’으로, 이후 <진도아리랑> 등 지명을 곡명으로 하는 아리랑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이 ‘지역성’(지명 브랜드)은 간과 될 수 없게 된다. 이에 두 가지 논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 즉, 하나는 출현 배경이 밀양 지역성을 담고 있느냐와 또 하나는 음악적으로 영남에 기층성을 두고 있느냐라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문제가 바로 ‘밀양에는 밀양아리랑이 없다’로 표현되게 한 것이다(이는 오늘날 전승단체도 없고, 연구단체도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면, 첫째 문제는 밀양아리랑의 조선중기 발생설로 영남루 아래의 <아랑각>의 주인공인 아랑의 정절정신과 이를 기리는 연례의식(年例儀式)이 밀양아리랑을 형성시킨 것이냐의 문제이고, 둘째는 영남 토리 메나리조의 꿋꿋함을 기층음악으로 하고 있느냐이다. 필자는 이미 1988년 관련설을 ‘가설에 불과하다’고 한 바 있지만 (김연갑, 1988년), 결론적으로 말하면 ‘논의의 여지가 많다’이다. 즉,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일 뿐이다.
선율은 '라', '도', '레', '미', '솔'의 5음 음계로 되어 있고, '라'로 시작하여 '라'로 끝나는데, 선율에서도 경상도 민요의 특징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기 소리제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다.

‘아랑’처녀 원귀설과 밀양아리랑
밀양아리랑에 대한 성격은 일제강점기 신문의 <방송난>과 <광고면>의 장르 표기를 통해 그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즉, 밀양아리랑 송출 총 92회를 분석한 결과 아리랑(1), 潟雜歌(1), 朝鮮音曲(1), 俗曲(17), 雜歌(4), 俗謠(4), 雜曲(1), 新民謠(18), 民謠(2)로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보면 ‘신민요’와 ‘속곡’으로 대별되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밀양아리랑을 대한 전문가들의 시각이 신민요 또는 통속민요로 인식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이 노래의 형성, 출현시기가 일제강점기 10년대 이후라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 이런 장르 표기가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노래의 정체성을 변별하는 기준은 되지 못한다.(한편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아리랑’을 장르 자체로 표기한 경우이다. 1934년 9월 8일 방송난에 ‘念佛과 아리랑’으로 한 것이 그것인데, 여기에서 밀양아리랑·강원도아리랑·함경도아리랑·경복궁아리랑·긴아리랑·신아리랑·아리랑을 말했다.)
밀양지역에서 불려지는 각편에는 <아랑처녀 원귀설>을 배경으로 한 사설이 불려진다.

송림속에 우는새 처량도하다
아랑의 원혼을 네설워 우느냐
  
아랑의 굳은절개 죽엄으로 씻었고
고결한 높은지조 천추에 빛난다
  
갸냘픈 아랑의 고운태도
죽어도 강혼이 남아있네

<아랑처녀 원귀설>은 억울하게 살해당한 처녀가 원한을 알리기 위해 원귀(寃鬼)로 나타나 해를 끼치자 담대한 사람이 원귀를 만나 한풀이를 듣고 해결해 주었다는 밀양의 설화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일제강점기 밀양, 영남루, <아랑처녀 원귀설>, 그리고 밀양아리랑을 주제로 한 각종 자료들을 시대별로 일별하여 밀양아리랑과의 관련성을 정리해 보았다.
  
<아랑설화와 밀양아리랑의 관계>



기   사
매체와 보도 일시
필자
비고
1
밀양 명물 영남루의 승경
동아일보(1926, 7. 28)

관련없음
2
밀양부사가 갚다, 밀양 아랑각
동아일보(1927, 8. 28)
우이동인(李學仁)
관련없음
3
전설의 조선, 밀양부사 갚다.
밀양 아랑각(上·中·下)
동아일보(1927, 8. 30)
우이동인(李學仁)
관련없음
4
스케취 영남루 下에서
동아일보(1929, 3. 27)
약산인
관련없음
5
영남루와 아랑각
매일신보(1934. 7. 17)

관련없음
6
정순녀의 아랑사
조선일보(1934, 10, 7)
함대훈
관련없음
7
아랑각과 힌 나비
삼천리(1935, 6월호)
윤백남
관련없음
8
아랑 傳說
매일신보(1936, 6. 7)
표기없음
관련설암시
9
영남루 죽림 속 영원의 처녀
<아랑위령제>
매일신보(1936, 6. 8)
표기없음
관련없음      
11
아리랑의 出處도 이곳?
동아일보(1936, 6. 9)
표기없음
  단순암시  
12
萬古의 순정처녀 아랑의 慰靈祭
조선일보(1937, 6. 5)
표기없음
관련없음  
13
아랑의 굳은 정렬 여성들의 好標本
동아일보(1938, 5. 31)
표기없음
관련없음  
14
아랑과 密陽(上·下)
조선일보(1939, 8. 28)
연희전문 정광조
  단순암시
15
농촌순례기 嶺南篇,
千秋의 한 품은 아랑사
월간󰡔삼천리󰡕(1940년 10월호)
유광열
관련없음    
16
嶺南樓와 아랑각
월간󰡔삼천리󰡕(1940, 10월호)
이상인
관련없음      
17
『華岳』
1947, 창간호
밀양지역 동인지
관련성 절대부인
18
民謠 아리랑에 대한 序說
≪鄕≫(창간호 1957, 11, 12)
이난숙
관련없음
19
國文學上의 보배, 영남루
국도신문(1958년, 9. 3)
황희영
관련없음
20
傳說 密陽 아랑각
한양(1963. 1월호)
김병옥
관련없음


위의 표에서 처럼 전체 19건 중에서 8·9·11·12·14, 5종의 기사가  밀양아리랑과 단순 암시 정도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전거나 그 주장 배경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대개의 기사 소재가 밀양 <아랑제>와 영남루를 다루었다는 성격상 치밀한 취재기는 아니라 해도, 예컨대 타이틀 상에서 가장 관련성을 드러낸  <아리랑의 出處도 이곳?>에서 “이 노래는 항간(巷間)을 풍미하고 있어서 모르는 이 없건만····(중략)- 아리랑 노래의 유래가 어데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이 아랑과 관련된 줄 안다”라고 하여 자신 없게 기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제시한 가사는 본조아리랑 1절로, 이 기사를 작성한 이는 밀양아리랑이 아리랑 자체의 발생을 연관시킨 것이다. 또한 8 <아랑 傳說>은,

“밀양아리랑 노래는 너무나 유명하야 언제 불러도 언제 들어도 그 애달픈 정조는 기여히 단장의 눈물 짜내고야 만다. 그러나 밀양아리랑의 주인공이 조선적 명승으로 이름난 밀양 영남루 밑에서 흘러가는 남천강물과 함께 끝없이 4백여년을 안고 고요히 잠자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매년 음력 4월 17일에 밀양군에서 거행하는 영원의 처녀 <아랑제>를 당하야 간단한 그 전설을 적어 보고자 한다.”

라고 하여 상당히 접근된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단적인 연결고리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5와 6도 같은 사정인데, 이는 당연히 ‘애달픈 정조는 기어이 단장의 눈물 짜내고야·····’라는데서 알 수 있듯이 밀양아리랑을 감상적인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는 결과이다.
그런데 밀양 지역의 동인지 《華岳》 창간호에는 주목되는 언급이 있다. 바로 밀양아리랑이 아랑 전설과 관계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한 글인데, 즉 “흔히 아랑사의 아랑에서 아리랑이 생겼다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며····”라고 관련설을 부인했다. 강한 어투에서 1947년이라는 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적 발상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지역 지식인들의 동인체 인식이라는 점에서 이런 회의를 접게 한다.
이상과 같이 특히, 앞에서 인용한 차상찬의 글에서 이 관련설을 배제하고 있어 아리랑 또는 밀양아리랑의 아랑처녀 원귀설화와는 무관함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아리랑(밀양아리랑)의 조선중기 발생설과 관련한 1930년 김지연의 소위 ‘密陽居住 金載德氏說-阿娘 訛音’(총독부 기관지《조선》, 1930, 6~7) 어원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설이 기록화 되는 1930년이 관련설이 밀양아리랑과 결합하는 기점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의 밀양아리랑에 수용된 이 설화와 관련한 사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음의 정연한 5절은 사설의 존재와 의미를 말하고 있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오네

저건너 대숲은 의연한데
아랑의 서른넋은 애달프다

송림속에 우는새는 처량도하다
아랑의 원혼을 네설워하느냐

남천강 구비처서 영남루를감돌고
벽공에 걸린달은 아랑각을비추네

영남루 비친달빛 교교한데
남천강 말없이 흘러만가네


밀양 태수의 외동 딸 동옥(‘東玉’-이후 이유가 없이 ‘아랑’으로 바뀜)은 자태가 곱고 인덕이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고 사모하였다. 어느날 아랑은 침모와 함께 영남루에 산책을 나갔다가 사모함을 억제하지 못한 말단 통인(通引)에게 대숲에 끌려가 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를 나무라며 끝까지 저항과 설득을 했으나 연정을 증오로 바꾼 통인은 아랑을 살해하고 말았다. 통인은 아랑을 아무도 모르게 대숲에 묻어버리기 까지 했다. 그 뒤 밀양 태수인 아버지는 딸을 찾지 못한 자책에 세월을 보내다 한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래서 새로 온 태수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새 태수가 부임 한 첫날밤에는 귀신이 나타나 놀란 태수는 죽어 나가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태수로 부임하려는 이가 없게 되고, 결국 조정은 누구라도 가고자 원하는 자를 태수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던 차 담력이 있다며 자신하는 한 사람이 태수로 부임을 받아 도착했다. 그리고 태수는  첫날 밤 불을 밝히고 앉아 기다렸다. 그런데 자정을 넘기자 세찬 바람이 일어 불을 꺼트리더니 머리를 산발하고 목에 칼을 꽂은 귀신이 나타났다. 담대한 태수는 눈을 부릅뜨고 누구냐고 묻었다. 귀신은 자기의 원통한 사연을 비로소 담대한 부사를 만나 밝히게 되었다며,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다음날 태수는 귀신이 이르는 대로 흰나비가 어깨에 내려 앉는 자를 범인으로 잡아 이실직고를 듣고, 이내 처형해버렸다. 이로부터 밀양에는 다시 처녀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진실이 밝혀지자 밀양 지역민들은 정절을 지키려다 죽은 아리랑의 넋을 위로하고 그 정절을 기리기며 ‘아랑 아랑’ 하고 칭송하던 것이 어느덧 노래가 되어 오늘날의 밀양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랑이 오래된 노래이고, ‘아랑’이 그 유사음임에서 상관성이 있으리라는 유추가 결과한 일설로, 설화가 노래의 배경설화로 전이한 것이다. 아랑설화는 <아랑각>의 존재로 보아 밀양아리랑 형성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은 분명하다. 이는 이 설화가 밀양지역 아랑설화에만 전해지는 고유 설화가 아닌, 고전소설〈장화홍련전〉,〈김인향전〉,〈숙영낭자전〉 등에도 전승된 설화인 점에서 그렇다.(『五百年奇譚』,최동주, 박문관편, 1923.『朝鮮傳說集』,이홍가, 조선출판사, 1944.『朝鮮民族說話의 硏究』, 손진태, 을류문화사, 1947.『韓國民間傳說集』,최상수, 통문관, 1958.)
이런 사정임으로 해서 1926년 밀양아리랑이 서울에서 음반으로 출현하여 유행을 하게 되자 밀양 지역에서나 아니면 문식이 있는 자에 의해 위의 사설이 짜여졌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 추정은 음반 자료, 남창 전경희(全景希)의 유행소곡 <밀양아리랑>(V49093B)이나 여창 박부용의 <신밀양아리랑>(오케 1692B), 출판 자료 김태준의 <조선가요의 여성관>(衆明, 1권 3호, 1933, 5. 83쪽. 필자 소장본)과 1935년 발행된 김지연의『朝鮮民謠アリラン』에서도 아랑 관련 사설은 나타나지 않아 재확인된다.
이번 해설에서 이 문제를 비중있게 다룬 것은 밀양아리랑의 정체성 규명에 중요한 계선이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관계가 있다면 이를 명료하게 정체성에 연결시켜야 하지만, 관계가 없다면 이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관계를 갖고자 할 때는 다른 차원에서 명분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설화적 인물 아랑의 ‘정절정신’은 역사인물인 김종직의 ‘충의정신’과 사명당의 ‘충의정신’으로까지 확대, 동일시하는데, 설화와 역사가 혼재할 때는 역사적 가치가 희석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아랑처녀 애기를 담은 사설이 불려지기 시작했을까?  앞의 설화 관련 5절 사설이 밀양아리랑 사설로 불려진 시점이 곧 설화와 밀양아리랑이 만난 것이고, 설화가 노래의 유명세에 의탁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 시점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의외로 관련성에 제기된 시점은 일제강점기인데도 이 사설이 부린 것은 해방 이후로 추정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필자의 조사로는 1954년으로 부터다. 월간《아리랑》(1954 12월호)에 의하면 가수 박단마(1921~1992/朴丹馬)가 민요풍의 <밀양아리랑>을 발표했는데, 이 음반에서부터 관련된 사설이 불려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음반에는 사설이 누구에 의해 구성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교태(嬌態)와 교성(嬌聲)이 특징인 박단마는 (1) 아리랑낭랑 (2) 아리랑춘풍(봄바람) (3) 할미꽃아리랑 (4) 아리랑 목동(1955) (5) 밀양아리랑 (6) 나를 두고 아리랑을 부른 ‘아리랑 가수’이다).

밀양아리랑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잘넘어간다(후렴)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에 애화가 전해있네

저건너 대숲은 의의한데
아랑에 슬픈넋은 애달프다

채색으로 단청된  아랑각은
아랑의 유혼이 깃들어있네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감돌고
벽공에 걸린달은 아랑각을비추네

대숲속에 우는새 처량도하다
아랑의 원혼을 네설워우느냐

촉선루 아래에 남강물은
논개의 원혼이 어려있네

영람루 비친달빛 고교한데
남천강 말없이 흘러만간다.

아랑의 굳은절개 죽음을얻었고
고결한 높은지조 천추에 빛난다

아랑의 아랑각은 아랑넋을 위로코
진주의 촉석루 논개충절 빛내네

팔각정의 영남루 웅장한모습
반공에 우뚝서 기관을자랑

송운대사 비각을 구경하고
경치좋은 표충사 들려나갈까

영남루 남천강 아랑각은
영남의 명성인 밀양의자랑

박남포 여관의 살(설)장구소리는
자다가 들어도 내낭군소리

‘박남포 여관 사장구 소리’
그러므로 이 사설 구성에 대해는 다음의 세 가지 설을 가능성으로 열어 놓을 수 있다.
하나는 밀양 출신 작곡가 박시춘의 영향력이다. 이 시기 박시춘(1913~1996)은 대중음악계의 중심에 있었고, 1926년 밀양아리랑의 음반 출현에 기여했다는 박남포(1894~1933)가 그의 부친이기 때문이다. 박단마의 고향이 경기도 개성으로 밀양이 아님에서 밀양 출신 박시춘에 의한, 또는 권유에 의한 작사라는 추정은 자연스럽다.
둘은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1955년 이 사설을 처음 수록한『歌謠集成』(1976년『한국가창대계』로, 1977년 『가요대전집』으로 개명)의 편자 이창배(1916~1983)에 의한 작사설이다. 이 시기 경기명창 김옥심 등 많은 국악인들의 신민요나 민요풍 가요의 개사와 작사에 관여를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셋은 단순한 상업적 발상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이 시기 음반사는 작곡, 작사자를 전속으로 보유하고 다양한 기획으로 그 활로를 찾고 있던 시기임으로, 상업적 목적에서 지역 정서를 반영한 가사를 지어냈다는 주장이다.
어떻든 이 가사의 출현. 그리고 음반화의 시점과 동기는 바로 아리랑 발생설과 어원설을 오늘과 같이 일반화 하게된 시점이며 배경이라는 사실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1926년 첫 밀양아리랑 음반 제작에 박남포한 인물이 주관했다는 주장이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첫 밀양 답사를 할 당시인 1979년, 몇 분들이 말한 ‘박남포 여관 설장구소리····’운운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당시 기억으로는 1950년대 중반, 박남포가 운영하는 읍내 여관에서는 늘 장구소리가 났다고 한 것인데, 이후 이 얘기의 배경이 박남포가 과거 <밀양예기권번>의 운영자였고, ‘예능에 소양이 남달랐던 이’로 밀양의 대중문화를 주도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곧 1926년 밀양아리랑의 음반 발매를 박남포가 주도했다는 주장의 배경임도 알게 되었다. 이는 1989년 밀양라이온스가 밀양역사에 건립한 <밀양아리랑비>에 ‘····일제시대 박남포 선생이 가락을 정리····’라고 하여 명문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1926년 이전의 밀양 지역 기생 활동상황과 이 중심에 박남포 존재가 확인되어야 한다.
1920년대 중반 전후 기생의 능력이 음악계에 효과적으로 분배되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 공연과 음반 취입, 그리고 방송 활동 등에서는 남도 출신 기생들이 서도 출신 기생들보다 더 크게 활약했다. 이런 상황은 서울 예단(藝團)에 지방 기생들이 2/3를 점한 것과 연관되는데, 곧 상업성에 의해서다. 이들은 가사·가곡·시조와 같은 레파토리를 궁중연희, 유성기 음반 취입, 배반(기생학교 졸업  공연으로 선생과 선배 앞에서), 사랑노름 등에서 연주를 하였으니 일반 예단에서의 연주 레파토리는 경서도 잡가, 판소리, 남도잡가, 창민요를 중심으로 했다. 이런 성향은 1930년 이르러 신민요로의 분화를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준다. 즉, 기생의 음악은 상업자본 논리에 매어있고, 매체에 민감했고, 그래서 대중의 기호를 향해 있었다. 이는 소위 ‘삼패류 레파토리’에 의한 대중 영합에 기울어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20년대 후반까지의 상황으로 굳이 일패니 삼패기생이냐가 문제 아니라 박록주나 박월정 같은 일류 명창 또는 여류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소리 잘 하는 기생들은 서울로 오게 되었다.
그래서 각 지방을 배경으로 한 통속음악이 서울에서 펼쳤다, 바로 밀양아리랑의 서울에서의 형성은 이런 지방 기생들의 활동과 레파토리 내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중의 취미와 가장 가까이 있는 기생 음악계는 매체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고, 1930년대에 이르러 이들 소리 기생은 전통음악과 신민요를 부르는 것으로 분화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전국의 각 권번들이 소리기생을 양성하여 배출해냈다. 부산에 동래권번과 봉래권번, 대구에는 달성권번, 밀양에는 예기권번, 진남포에는 삼화권번, 대전에는 대전권번, 원산에는 춘성권번, 안악에는 예기조합, 겸이포에는 기생양성소, 박천에는 기생친목회, 함흥에는 반용권번, 수원에는 화성권번, 이리에는 예기조합이 알려져 있었다. 이런 상황은 일단 밀양에 예기권번이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이 확인이 된다.
그리고 30년대 중반에는 전국규모 명창대회를 치루기도 했다. 즉 매일신보 1936년 4월 19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 권번 주최로 3일에 걸쳐 “조선 고래의 음악을 장려 추앙한다는 취지에서 전 조선 각 권번에 예기 대표 선발 명창대회’를 전국을 대상으로 개최”했다.(『동아일보』,1936.4.7.) 이 행사의 수상 등의 결과는 확인 되지 않으나 성황(『동아일보』,1936.4.23.)을 이뤘다고 하여 전국 대상의 활동을 했음을 알게 한다. 바로 이런 예기권번의 활동상은 1920년대 중반 서울에서 음반을 낼 정도의 위치였음을 추정케 한다.
박남포에 대한 독립적인 자료는 없다. 일부에서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예명 ‘박남포(朴南浦)’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밀양지역 70대 정도의 분들로부터 ‘박시춘의 부친으로 기생 양성소인 권번을 운영하여····’라거나 ‘5백 섬지기 지주로 밀양예기권번을 운영했던 인물’임을 들을 수 있다.
이런 박남포의 명성은 어느 정도는 밀양아리랑 출현에 기여했음을 추정케 한다. 사살 1930년대 초 피리 명인 박종기와 명창 김소희에 의해 진도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상황이나 1936년 최계란이 부른 <대구아리랑>, 1937년 서영신이 부른 <부산동래아리랑> 등의 음반이 지역 권번의 지원과 출신 소리기생의 역활로 발매되었다는 점을 감안 하면 이를 수긍하게 된다.
이로서 밀양아리랑은 조선 중기에 발생된 노래가 아니고, 1920년대 밀양지역 예인에 의해 구성, 음반으로 출현하여 서울에서부터 유행한 것이다.

가락의 전통성, ‘밀양적’인가?
오늘날 일반적인 자료에는 밀양아리랑은 우리나라 4대민요의 하나로 영남지역 전통민요로 소개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전통민요는 가락의 전통성, 기능의 생산성, 전승의 지속성을 지닌다. 이런 기준에 의한다면 밀양아리랑은 가락의 전통성에서는 의심을 받고 있다. 즉, 밀양지역의 기층음악을 담고 있느냐? 또는 경상도 메나리조인가? 에 대한 의문이다. 지금까지 발매된 모든 음반의 창자가 모두 서울소리 명창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실 1980년대 이후의 거의 모든 자료에서는 밀양아리랑은 경상도 민요 특징에서 이탈되어 오히려 경기소리에 가깝다고 했고, 이미 불려지는 아리랑의 후렴을 수용하여 형성되었다고도 했다.
물론 1990년대에 들어 <밀양백중놀이>와 <게줄다리기>에서 불려지는 밀양아리랑의 후렴을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낳(났)네’가 아닌 소위 ’지게목발소리‘라고 하는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났네‘로 부르는 형태를, “밀양 특유의 사투리로 생동감과 즉흥적인 흥을 더욱 돋우고 있어, 활성적인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질러내는 소리는 경상도 사람들의 성급하면서도 시원 시원함을 추구하는 성품과 관련되어지며····”라고 경상도 툭유의 토속성으로 해석을 한다. 또한 “밀양아리랑은 <라>를 중심음으로 진행되는 라선법이고 단조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토속적인 사투리를 사용하고, <아리당다꿍>으로 질러서 소리를 시작하는 점, 템포가 빠르고 익살스러운 조흥구와 세마치장단의 흥겨움 등은 슬프기 보다는 오히려 장조적 성격의 밝음과 경쾌함을 보여준다. 즉 단조적인 가락의 형태를 지니지만 실제로는 장조처럼 꿋꿋하게 들리는데, 이것은 곧 <밀양아리랑>의 토속성이라 하겠다.”라는 재해석을 하기도 하나 ’지게목발‘ 소리가 밀양아리랑의 본래적인 후렴소(後斂素)인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어 이 같은 해석을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서정매, 2007.)  그럼에도 밀양아리랑에 대한 다음의 견해는 매우 유익하다. 민요의 시원이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계승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이 곧 밀양아리랑의 현재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밀양아리랑은 비록 19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신민요의 하나로 추정은 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영남의 민요가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통속화가 되었다 하더라도 경기민요의 창자들이 부르는 밀양아리랑과 밀양의 토박이가 부르는 밀양아리랑은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밀양아리랑이 밀양에서 뿌리를 내려 밀양 특유의 음악성과 토속성으로 전승되어오고 있음을 보여준다.”(서정매)

다음의 사설이 소위 ‘밀양적 밀양아리랑’이다.


                               밀양아리랑(2번 트랙)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후렴
                             아리랑당닥궁 쓰리당닥쿵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어쩔시구 잘넘어간다

                             정든님이 오시는데 인사를못해
                             행주치마 입에물고 입만빵끗

                             옥양목 겹저고리 연분홍치마
                             열두번 죽어도 못놓겠네

                             담넘어 갈때는 큰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떤다.

                             앵기면 앵기고 말면말지
                            고개만댕이 얹지놓고 만단말가

                            남에집 서방님은 가마를타는데
                            우리집에 저문딩이는 콩밭골만탄다

                            시어머니 죽고나니 방널러좋고
                            보리방아 물부오노니 생각이난다

                            어시랑살랑 춥거들랑 나품에안기고
                            비개가 낮거들랑 내팔을비어라

                            삼각산 만댕이 허리안겨돌고
                             나어린 신랑품에 잠잔동만둥

                              길가집 담장은 높아야좋고
                             술집의 술어마씨는(술집아줌마) 곱아야좋다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중천에 뜬달은 아랑각을비추네

                            밀양의 영남루 경치가 좋아
                            팔도에 한량들이 다모여든다



        Ⅱ. 항일민족 운동가, 역사와 함께

1926년 9월 29일,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이 개봉되기 하루 전 전단지 1만 매가 압수당했다. 개봉도 되기 전에 주제가의 일절인 ‘문전의 옥답은 다어디로가고/ 동량의 쪽박이 왠일이냐’가 불온(不穩)하다는 이유였다. 이후 두 달 후 ‘벼섬이나 나던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던 친구는 감옥으로 가고요’ 수록된 현진건의 작품 <고향>이 삭제를 당한다. 1931년에는  길주 지역 학생들이 고무인(印)으로 태극기와 함께 아리랑 가사를 새긴 것이 발각되어 검속되고 같은 해 경북 영덕군(盈德郡) 한 야학(夜學)에서 아리랑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사가 10월의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아리랑이 항일민족운동 진영에서 노래운동 차원으로 불려졌음을 알게 한다.
바로 이런 사정으로 해서 아리랑은 스스로 ‘지하의 노래’이거나 아니면 친일화를 강요받게 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朝鮮民謠アリラン』를 발행하여 유포시킨 <非常時아리랑>, 1941년 유행가 <滿洲아리랑>, 1942년 국민가요 <愛國아리랑>의 유포가 그 한 예이다. 이렇게 한편에서 아리랑이 훼절(毁折)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중국이나 일본의 동포사회에서는 민족해방운동에 함께 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국과 로령지역에서 불린 <독립군아리랑>과 1941년 임시정부 광복군 군가 <광복군아리랑>, 한유한 작(作) 창극<아리랑>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모두 밀양아리랑 곡조 또는 그 변이형으로 부렸다. 밀양아리랑의 긍정적 기능 확대인 것이다.
<독립군아리랑>은 가사는 같지만 두 가지 곡조로 불린다. 하나는 영천아리랑과 유사한 곡조와 또 하나는 밀양아리랑 곡조를 쓰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1920년대 말 조국을 떠나는 이들이 머물렀던 국경지역에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독립군아리랑(4번 트랙)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독립군 아라랑 불러나보세 (후렴)

                           이조왕 말년에 왜난리나서
                           이천만 동포들 살길이없네

                            일어나 싸우자 총칼을메고
                            일제놈 처부셔 조국을찾자

                           내고향 산천아 너잘있거라
                           이네몸 독립군 따라가노라


                           부모님 처자를 리별하고
                           왜놈을 짓부셔 승리한후에

                           태극기 휘날려 만세 만만세
                           승전고 울리며 돌아오리라

독립군(獨立軍)은 협의로는 한국사에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동안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던 무장 단체를 총칭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의병과 비슷한 활동 성격을 띠지만 한반도에서 일제를 몰아낸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으며 계획적인 훈련을 받고 전투용 무기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일반적으로 구한국 군대 해산 이후 이들이 참여한 전투단체를 말한다. 광의로는 해외, 특히 중국과 로령 지역에서 항일전에 참여한 모든 개인 또는 집단을 총칭한다. 그럼으로 이 노래의 주체는 후자로 조국 해방을 위해 국경을 넘는 각오를 노래한 젊은이 이다. 음반을 통해 확인되나 그 전승이 특정 지역에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한편 이 독립군아리랑은 선후 관계가 규명되지는 않지만 다음의 광복군아리랑과 비교가 된다. 이 <光復軍아리랑>(필사 자료 光復軍 제3지대 소속, 장호강 장군 유품), 엄항섭 著(金九선생 實記)『屠倭實記』(1947), 한유한 편『光復軍歌集』(1947)에 수록되어 전거가 분명하다. 국내에서는 1984년 충남 논산 지역에서 채록된 바 있다.

                               광복군아리랑(5번 트랙)

                              우리네 부모가 날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전해 주소

                             광풍이 불어요 광풍이불어요
                             삼천만 가심에 광풍이불어요

                              바다에 두둥실 떠오는배는
                              광복군 싣고서 오시는배래요

                               동실령고개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날려요

  1980년대 충남 예산 인근 지역에서 조사가 되기도 했으나 전승 주체는 1941년 성립된 광복군이다. 관련 자료에는 <용진가> 등과 함께 4대 군가의 하나로 수록되어 전해진다. 광복군 제3지대가를 작사한 장호강 장군( 1916~2009)의 증언에 의하면 국내진격작전을 위해 사용한 군가로 광복군에서 채택한 것이라고 했다. 곡조는 밀양아리랑으로, 이는 밀양아리랑의 분명한 기능 확대이다.  
밀양아리랑의 이러한 기능음악(Functional music)적 속성은 해방후 국군의 행진가, 정부의 의전(儀典)음악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의외의 변이도 확인된다. 즉, 중공군의 항미원조전(抗美援朝戰) 심리전에 활용된 예이다. 물론 남북군 간에나 미군의 심리전에서 음탄(音彈)으로 쓰리기도 했다. 예컨대 1951년 1월의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에서,

                 우리나 님은요 날그려울고/전쟁판 요내들 임그려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울며넘네

라는 사설의 아리랑을 방송했는데, 귀순병이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는 보도가 있었음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미군들은 북한군과 중공군을 구별하기 위해 아리랑을 활용했고, 중공군은 남한과 북한군의 구분을 위해 <애국가>을 활용했다. 이런 용도의 하나로 중공군에서 밀양아리랑 곡조의 다음과 같은 사설 <파르티잔유격대 아리랑>을 불렸음이 주목이 된다. 1954년 중공군이 발행한『朝鮮歌謠集』에 수록되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이 의외의 내용이다.

<파르티쟌 유격대 아리랑>(6번 트랙)
  남조선 바라보니 가슴아프나
  복조선 백성은 행복하다네

이승만의 머리는 뾰족하고
   김성주 머리는 표주박같다네

   백두산 공화국 깃발날리고
    제주도 한라산 유격대가섰네

    아가씨 날좀보소 자세히보소
    겨울에 핀꽃같이 사랑해주오

   그런마음 가진당신 나는좋아
   꽃가마 가져오면 당신을따를께

     나는야 군인 사랑할 수없네
          그대하고는 군인아라서 결혼할수없네

유격대 고사리 맛있는데
  미국의 서양요리 나는야싫다

       오이농장 고슴도치 휘젓는게싫고요
  조선 인민은 이승만이싫어요

   금강산을 탐내는 미국이놈들아  
   침략만 해봐라 다리를자르리라

  <파르티쟌 유격대 아리랑>이란 곡목에서 이 노래의 구체적인 기능을 알 수 있는데, 북한군과의 구분을 어렵게 하고, 파르티잔 활동에서 부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군이 부른 노래임에야 있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런 악의적인 사설은 아리랑에서는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이 가사가 북한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공유된 인식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전쟁기에 아리랑도 파열(破裂)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의외성은 아리랑을 전통적인 민속음악 장르의 하위 단위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1954년 ‘국제 민속음악 협의회(International Folk Music Council)’ <상파울로 회의>에서 민속음악(Folk Music)을 정의 한 조건, 즉 민요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어야 하며(連續性), 지속되되 그 민요를 지속해 온 공동체의 창조적 욕구에 의해 변화가 일어나야 하며(變化性), 그렇게 일어난 변화들은, 그 민요를 전승하는 공동체의 여러 조건과 성격에 따라 맞는 것들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린다(選擇性)는 것이다.(김익두) 정리하면 민속음악은 연속성·변화성·선택성이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조건을 구속하는 것이 ‘공동체’이다. 밀양아리랑의 중공군 변용은 밀양지역, 나아가 한반도 더 나아가 한민족을 넘은 외국 또는 세계에서의 변용이라는 사실에서 아리랑은 민속음악 그 이상의 음악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이다. 1960~70년대 월남전을 규탄하는 반전문화 속에 특히, 영어권에서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활용한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리랑은 이미 세계화 되어있다. 문제는 이 세계화 상황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수정할 계기를 마련해야 되는데, 바로 아리랑의 3대 정신 즉, 저항·대동·상생정신을 세계성의 제일 조건임을 인식시키는 일이다.  
단순히 밀양아리랑의 역사성과 속성을 이용한 것으로, 또는 밀양아리랑의 ‘역사에의 의탁’성향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아리랑의 전체상에서 볼 때는 이 <파르티쟌 유격대 아리랑>은 세계성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민주화, 통일에의 지향
1980년대 민주화의 열기 속에 밀양아리랑은 노동가로도 기능했다. 소위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의 선두가 되었다. 2행 1련의 두 줄 후렴, 이 간명하고 용이한 형식에 행진곡풍의 곡조가 노가바의 전형이 되게 했다. 이는 의도적인 ‘비틀기’ 또는 콘트라화튬(Contrafactum) 현상에서 결과한 것으로, 전승 가사를 자기식으로 바꿔 부르려는 욕구가 강한 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제3세계에서의 노래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신밀양아리랑(7번 트랙)
                            이불이들썩 천장이들썩 지봉이들썩
                             혼자자다 둘이자니 동네가들썩

                             공장이들썩 공단이들썩 인천이들썩
                             우리노동자 단결하니 전국이들썩

                             과장이벌렁 상무가벌렁 사장이벌렁
                             민주노조 결성되니 회장이벌렁

                              학생도단결 농민도단결 민주시민도함께
                              우리노동자 앞장서니 온나라가불끈

‘노래적’ 재미와 내용적 선동성이 갖춰진 운동가의 전형이다. 이런 노래가 불러지던 시기의 민주화 열기는 통일의 열기로 진화되었다. 이 시기 민주화 논리는 통일 논리이고, 통일운동은 민주화 운동으로 동일시되던 상황이다. 다음의 <통일아리랑>은 분명한 의도적인 개작이다.


                                 통일아리랑(8번 트랙)

                            아리 덩덕쿵 쓰리 덩덕쿵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잘넘어간다(후렴)

                            갔던이 돌아오니 동네가들썩
                            나도좋아 너도좋아 모두가좋으니

                            모였네 모였네 여기다모였네
                            우리는 한나라 이웃사촌이라네

                             오는소식 가는소식 웃음꽃소식
                             어깨동무 허리동무 아우러나보세

                             이바람 저바람 통일의바람
                             이나라 하나되는 통일의바람

                             들풍년 산풍년 만풍년들어라
                             우리동네 온나라 풍년잔치얼씨구

여러 아리랑에서 이 가사에 맞는 것은 밀양아리랑임이 분명하다. 이 음악적 속성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아리랑’인데, 그 중 밀양아리랑에 대한 변별성인 것이다.


                     Ⅲ.  밀양아리랑의 정체성, 미래의 가치

정체성(identity)은 특정 집단의 내부에서는 동질성을 견지하고 있으면서 집단의 외부에 대해서는 차별성을 가지는 특성으로 규정한다. 또한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그리고 ‘해석 가능한 코드로 결합된 상징 또는 상징체’라는 해석이다. 이들 해석의 공통은 ‘유지되어 오는 가치 있는 성질’이다. 그렇다면 밀양아리랑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먼저 여러 아리랑과의 관계 중 음악적 관계를 살펴본다.

<아리랑의 음악적 계보>
태백산맥의 (뫼)아리(아라리·어러리·아라레이)
A-긴아라리
Aa-엮음아라리
Ab-중원아라성
Ac-한오백년

B-잦은아라리(강릉아라리)
Ba-인제뗏목아리랑
Bb-강원도아리랑

C-문경아리랑(예천아리랑·상주아리랑·영천아리랑)
Ca-서울 잦은아리랑(H. B. 헐버트 채보)
Cb-서울긴아리랑(정거장타령)
Cc-밀양아리랑
Cd-진도아리랑(산아지타령+후렴)

D-주제가<아리랑>(신민요·유행가 아리랑 등 형성 계기)

A, B, C까지는 자연적 전승 형태이다. 그러나 A·B·C의 관계는 음악적 파생 관계이나 Ca~ 이하는 인위적 전승 형태이다. 즉 음악적 긴밀성이 희박하여 문화적 관계로 해석해야 한다. 전자는 토속성, 후자는 문화적 관계(통속성)가 존재를 결정한 것으로 Ca, Cb, Cc, Cd 간에는 음악적 관계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A·B와 Cc(밀양아리랑) 간에는 음악적 긴밀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밀양아리랑은 어떤 조건으로 아리랑이란 장르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다음의 후렴표에서 단적으로 확인이 된다.

<각 아리랑 후렴>

① 정선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거주오

② <조선의 유행요>(《우편호우지신문》)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얼쑤 아라리-야

③ 아르랑<Korean Vocal Music>
   A-ra-rung a-ra-rung a-ra-ri-o
   a-ra-rung ol-sa pai ddio-ra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아르랑 얼싸 배띄어라

  ④『통유호령문/通諭湖嶺文』
   아나란 아나란 아아리

  ⑤ 긴아리랑타령
   아리랑 아리렁 아라리가낫네
   아리랑 띄여라 노다노다가게

  ⑥ 강원도아리랑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⑦ 주제가<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⑧ 밀양아리랑
   아리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아라리가 났다

  ⑨ 진도아리랑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⑩ 아리랑타령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게

이상에서 10종의 아리랑 후렴을 살폈다. 모두 후렴소(後斂素) ‘아라리’를 동일체의 요소로 지니고 있다. 문화의 이동(전파) 결과로 보거나 인간행위의 보편성으로 보거나 간에, 의미 있는 현상으로 ‘아라리’가 어원의 최소 실사(實辭)이며, 동시에 동일성의 단서, 즉 DNA이다. 결국 모든(소리) 아리랑은 ‘아리’ 또는 ‘아라리’를 함유한 2행의 후렴 여부가 장르적 정체성을 확정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밀양아리랑의 이러한 정체성은 이러한 음악성과 형식에서 보다는 ‘밀양’이라는 지역성과 노래로서의 성격이 보다 뚜렷하다. 즉 지역성에서 형성된 것으로 사설의 ‘투박함’과 선율의 ‘쾌활함’이다. 이 사설과 선율에서의 성격은 밀양아리랑의 독자성으로 정체성의 제일 요건이 된다. 지속과 변화에서 보면 설령 서울에서, 음반에 의해 경기소리로 출현 했다 해도 현재 일부이긴 하지만 밀양에서는 소위 지게목발 소리에 의해 ‘밀양적’인 아리랑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날좀보소···의 질러대는 선율에다 후렴 가사를 붙인 것으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은 긴장(tension)과 강조이며, 이완(relaxation)으로의 전개로서, 이는 맺힘에서 풀림으로 이끄는 연역적인 선율형태로 밀양아리랑 특유의 맛이라 하겠다. 거기다 <지게목발소리>라 불리우는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의 밀양 특유의 사투리로 즉흥적인 흥을 더욱 돋우고 있어 활성적인 생동감을 자아내게~”(서정매)한다.

이런 사정임에 밀양아리랑의 역사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생애에 의탁하거나 <밀양아리랑(대)축제>에서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신 사명당 임유정 성사의 충의정신,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이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지덕정신, 죽음으로서 순결의 화신이 된 윤동옥(아랑) 낭자의 정순정신···”을 직결시키는 것은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는 북한이 밀양아리랑에 대한 해석에서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시대적 필요성
밀양아리랑이 민속문화이든 대중음악이든 아니면 아리랑이란 장르의 하위 단위이든 밀양아리랑의 가치는 어제나 오늘에 잊지 않다. 바로 내일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함에서 밀양아리랑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계승, 지향한다.
첫째, 지방화를 겨냥한 계승이어야 한다. 밀양아리랑은 잎에서 살폈듯 지방화, 주체화를 실현시킨 문화이다.  
둘째, 통일을 전망하는 계승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 곧 동질성 회복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셋째, 주체화를 실현하는 계승이어야 한다. 주체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미래적 계승이 어렵다.
넷째, 세계화를 겨냥하는 계승이어야 함도 당연하다. 국가, 민족 브랜드화는 세계화의 전제이다.
다섯째, 생태화를 실천하는 계승이어야 한다.(임재해) 아리랑은 기본적으로 ‘삶의 노래’이기에 자연 상태로의 회귀를 노래한다. 아리랑이야 말로 생태 문제를 감당해야 할 미래문화로, 밀양아리랑이 그 중심에 있음은 물론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밀양아리랑의 역사는 수난과 환희 그리고 격동이 엇갈려온 한민족사와 함께했다. 이는 노래는 ‘추억의 묘비명’이라는 단순한 회고기의 방증만이 아니라 역사의 증언록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친일적 가요 <滿洲아리랑>, <非常時아리랑>, <愛國아리랑>과 국민극 <아리랑>이 황민화에 복무할 때 밀양아리랑은 당당하게 광복군의 국내진격작전을 벼르며 불렸다. 아리랑이 결코 지하화 하거나 단순한 망명이 아니었음을 역사화 했다. 바로 밀양아리랑의 역사적 위치를 알려 준 것으로, 아리랑의 저항성과 생명력을 입증하는 것으로 계승해야 할 속성이다. 이로서 아리랑의 시대적 필요성은 분명한 것이다.
  
밀양아리랑의 ‘교과서’
2003년 <남도정서의 정수박이 그 보배로운 3대의 소리 진도아리랑>, 2004년 발매된 <삶의 소리 천년의 노래 정선아라리>와 <영천아리랑>, 2005년 <탄생 대구아리랑> 등이 이미 발매되었음에도 밀양아리랑은 기획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역 자체 내에서의 발의가 없었던 것은 밀양아리랑을 아낀 탓도 있는 듯하다. 밀양아리랑의 명인(名人) 김상용(1916~2004)선생이 작고하기 3년 전 <01‘ 인사아리랑축제>에 참가했을 때 음반 제작을 의뢰하자 ’예. 예, 그런데···’로만 답한 적이 있다. 아마 당시 언론에 조명을 받던 <밀양백중놀이>와 <감내게줄다리기>에서의 부르던 밀양아리랑을  ‘비디오가 아닌 음반으로 내서 그 효과를 낼 수 있겠느냐?’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속된 말로 ‘여차 여차하고 저차 저차해서····’ 돌아가신 후 이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없었고, 필자도 명인의 상실을 들어 음반사의 종용에 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체 내에서 기획을 하지 못한 것은 밀양아리랑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것도 이유일 수 있다. 사실은 이 밀양아리랑의 정체성 규명과 이의 공유 문제가 축제와 같은 주제 행사 개최와 별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행사에만 치우쳐 온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1990년대 중반 지게목발을 치며 부르는 밀양아리랑의 그 강렬함 그대로를 음반화 하지 못해 두었음은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판단을 음반사가 받아들였다. 더 이상 미룰 경우 60대 이상의 토박이 소리꾼을 만나기 쉽지 않다는 이유 때문인데, 다행히도 ‘경기 소리꾼에 의한 밀양아리랑 음반은 절대로 안된다’는 음악 전공 제보자의 고견을 음반사 측이 수용하여 고 김수양님의 음원과 김경호, 신인자 두 분의 소리, 그리고 배우 김종엽이 재현에 함께 하게 되었다. 이번 음반 <嶺南 名物 밀양아리랑>은 밀양아리랑의 예술성을 담기보다는 전체상과 토속성(현재적), 그리고 변용 상황을 담아 그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라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변용 상황의 버젼을 재현의 의미로 김종엽선생을 통해 제시했다.(현장적 즉흥성을 담기 위해 연습 없이 당일날 녹음하였다.)
우선 성글더라도 하나의 텍스트가 마련되면 이를 수정, 보완하는 작업이 뒤 따라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제작을 하게 되었다. 또한 연구와 새로운 버전의 음반제작에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밀양뿐만 아니라 전국의 민요 공동체사회가 급속히 변화하고 해체 일로에 있음은 분명하다. 이로서 아리랑의 현장 전승상황에도 여파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중략
최근 들어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과잉 상태이다. 과함은 그리 반길 일은 아니다. 그 과함의 문제 중 하나는 편중에 있다. 되풀이 되지만 아리랑은 여럿이며 하나이고, 하나이며 여럿이다. 독립 장르로서 그 각각은 전체이며 위상이기도 하다. 연구나 문화행위에서나, 또는 지자체나 국가에서의 브랜드 차원의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고려해야 될 것은 자료정리와 그 해석의 입론을 세우는 것이다. 기존의 구비문학적 중심 시각은 해외 동포사회와 북한, 그리고 세계 속의 아리랑을 해석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첫 트랙은 김상용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고 김수야(1936∼2009) 할머니의 생전 음원을 제보자의 도움으로 수록했다. 녹음 상태는 그리 좋지 연구 자료로는 귀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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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야 할머니의 밀양아리랑

김수야 할머니
(2002. 1. 23. 당시 69세. 자택에서)


김수야는 본래의 신명과 세월의 경륜으로 마당의 신명을 좌우하는 역량을 발휘 한 분으로   세마치장단을 두들기며 ““날좀보소∼날좀보소∼”하며 부르던 밀양 아낙네의 초성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했다. 진도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은 후렴으로 시작을 하지만 밀양아리랑만큼은 그렇지 않다. 물론 후렴구로 노래를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밀양아리랑 특유의 맛이 나지 않는데, 이는 질러내는 소리 특유의 긴장감과 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밀양아리랑은 ‘날좀보소’의 경상도식 어투에 맞게, 질러서 소리 내어야 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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