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아리랑 연표



  아리랑(2005-09-08 15:59:04, Hit : 1623, Vote : 142
 아리랑의 역사연표

아리랑의 역사연표

아리랑이 '산신가’(山神歌)나 일 노래로만 불렸던 시절의 '흙의 노래'에서 역사의 현장과 시대의 성격을 변화하는 19세기 말 대원군(大院君) 시대, 이로부터 20세기 를 거쳐 21세기를 맞는 오늘에 이르는 백년사(百年史)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다 사다난(多事多難)한 시대였다. 이 과정에서 아리랑은 고난과 역경을 함께 한 동반 자로서 생채기난 가슴을, 움추려든 어깨를, 힘겨워 굽은 허리를 어루만지고 쓰다듬 어 고난의 고개를 넘게 해 주었다. 아리랑 백년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867년 경복궁 중수(重修)공사에 부역 온 강원도 장정들이 '아라리'를 불렀고, 명성왕후는 소리꾼들을 궁중으로 불러 '아리랑타령'을 듣기도 했다. 이 시기를 전 후하여 아리랑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상황은 황현의「매천야록」에 '아리 랑타령'이란 이름과 함께 기록 되어 있다.
이 때를 전후하여 아리랑은 대중가요(歌謠)처럼 확산되기 시작했다.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사회가 동요하고 열강들의 수탈이 노골화되자 아리랑은 이를 반영하여 시대의 전면에 나섰다. 참요(讖謠)적인 성격으로의 확산이었다. 이 에 대해서는 1894년 일본의「우편보지신문」과 1896년 선교사 H.B.헐버트의「Kore an Repository」기록 등에 나타난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병탄조약으로 일제는 쓸만한 논밭을 뺐기고 살길을 찾 아 떠났다. 그들은 유이민(流移民)자들이고 정치적 망명객(亡命客)들로 가슴에 담 고 간 아리랑을 해외에 전파시켰다. 그런 곳이 하와이.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이다.


1919년 3.1 민족운동은 깃발(태극기)과 노래(애국가,아리랑)로 무장한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었다. 그럼에도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으로 많은 지사들이 굴복하고 말았다. 그 뒤 7년 뒤인 1926년 10월 1일 일제는 조선 총독부 청사를 완공시키고 그 기념식을 거행했다.
조선 통치를 위한 준비를 끝냈다는 호언을 하는 자리였다. 바로 이날 나운규는 이를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듯 같은 날 종로 〈단성사〉에서 영 화<아리랑>을 개봉했다. 이로서 주제가 '신아리랑'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이 아리 랑은 불온한 노랫말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개봉 첫날 총독부에 선전지를 압수 당하 고 민요아리랑 까지도 음반판매 금지처분을 받았다. 이로부터 많은 신민요와 가요 아리랑들이 그 반작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밀양·진도아리랑·'강남아리랑' ·'아리랑 낭낭' 등이다.


1930년대 후반, 국내의 전반적인 친일(親日)로 아리랑도 변화했다. 일제의 만주 이주 권유에 동조하는 '만주아리랑'이 탄생되고 사진엽서 같은 매체를 통해 아리랑 을 기생의 노래로 왜곡시켰고, 대동아 공영권의 일원으로서 천황을 위해 대동아전 쟁에 총력을 다 해야한다는 내용의 '비상아리랑'을 급조(急造), 보급하기도 했다.


1940년 중경 광복군(光復軍) 결성 등을 기점(起點)으로 해외 항일독립운동 세력 이 조직화됨으로서 본격적인 무력 항일(抗日)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아리 랑의 성격도 변화를 했다. 일본 순사를 따돌리기 위해 노랫말을 거꾸로 해서 부른 '거꾸로아리랑'('진도아리랑')이 그것이고, 중국에서 광복군아리랑. 장백의 새아 리랑등이 탄생한 것이 그것이고, 님웨일즈와 김산의「Song of Ariran」이 출판된 것이 그것이다.


1945년 광복, 해방(解放)의 혼란 와중(渦中)에서 아리랑은 국가(國歌) 대신 의 전용(儀典用)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 좌우 대립으로 각각의 주장을 담은 아리랑들 이 만들어져 불려지기도 했다. '농민아리랑', '이북아리랑'등이 그것이며 '정선아 라리'에서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 한 덩어리 된다네"와 같은 노랫말들이 탄생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19개국 참전용사들에게 아리랑은 한국의 심볼로 전해져 해외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로 전혀 새롭게 편곡된 아리랑들이 탄생되었다. 그 하나가 미국의 째즈 뮤직션 오스카 패터 포드의 'A-Deng -Dong'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파된 아리랑의 의미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전달되었다. "전쟁과 기 아의 나라, 한국의 슬픈 노래"란 것이다.


전쟁으로 남북분단이 고착(固着)되자 '북한아리랑'이 탄생되었다. 그것이 '영 천아리랑'.'경상도아리랑'.'살피막 아리랑'.혁명가곡 중의 아리랑들로 남측에서 는 불려지지 않는 북측에서만 불려지는 것들이다. 이들은 창법과 기능 면에서 전 통적인 남측의 아리랑들과는 다른 것들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양식의 아리랑 탄생이며 우리 음악의 다양성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1980년대 '86 아세안게임과 '88 올림픽 경기에서 아리랑이 행진곡과 수상식 행사음악으로 공식 채택되어 세계에 알려졌다. 특히 1990년 남북한이 아리랑을 남북 단일팀 단가로 합의함으로서 연구 붐과 함께 민족사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갖게 했다. 또한 수많은 창작 아리랑이 탄생되었고 국악 분야의 작품들이 두드 러지게 나타났다.


오늘의 시점에서 아리랑은 한민족공동체를 실현시키는 '새 세기의 힘'으로 작용해야 한다. 이것이 아리랑을 논하는 당위성이다. 그럴 수 있는 기반은 '한 민족아리랑축제'의 정례화와 유네스코의 '아리랑상' 제정, 그리고 <아리랑박물 관>건립 등 필요성은 특히 진행 중인 국악 칸타타 '아리랑판타지'와 양악 관현 악 '아리랑환타지'를 통해서이다.


특히 제 3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ARIRANG PRIZE(아리랑상) 시상이후 국내외의 관심과 북한의 4월 민족축전주제를 <아리랑>으로 함에 따라 명실공히 아리랑은 한민족동질성의 구체적인 인자로 인식됨은 물론 세계의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아리랑사의 실상들이 이 자료집의 여섯 단락 속에 제시된다. 결과적으로 이「아리랑판타지」는 다가 올 새 세기에 탄생될 "그 어떤 아리랑"의 이름이기도 한데, 그것은 언젠가 남과 북이, 더 나아가 127 개국 동포사회가 하 나로 아우르는 한민족공동체가 실현되는 그 날에 하나의 목소리로 부를 것 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어제, 오늘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내일의 노래인 것 이다.




아리랑연표◇ 주요 아리랑 관련 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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