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아리랑-아리랑 연표



  기미양(2006-06-01 22:32:44, Hit : 1502, Vote : 141
 아리랑연표◇ 주요 아리랑 관련 사항 ◇

◇ 주요 아리랑 관련 사항 ◇

1) 1953-휴전 직후, 판문점 포로교환 현장에서 아리랑이 연주되고 불렸다. 이런 상황은 중국측의 문헌 1953・북경 인민문학출판사・전문・20쪽
≪板門店記事≫에 ‘我要歌’로 기록되었다. ≪한국전쟁의 포로≫・국방군사연구소・1996・237쪽.

2) 1964-동경 올림픽 남북 단일팀 논의 시, 국기 게양 연주 음악 50초 중 남북 각 애국가 25초씩을 사용하자는 논의와 함께 아리랑을 단가로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 때 호칭・깃발 등에 대해서는 논의에 그치고 말았으나, 아리랑을 단가로 하자는 합의만은 “단번치기로” 이루어냈다.
3) 1967-한미행정협정(SOFA)에 따라 미8군 전용 택시의 명칭을 ‘아리랑 택시’로 했고, 매출액의 6~8%를 받기로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4) 1981-세계상이군인회(일본 나가사키 오무라 수용소) 회원 2만 3천 명이 모인 총회에서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5) 1984-영화인들이 북측에 합작 영화를 제안했을 때 첫 안이 <아리랑>이었다. 이후 남북에서는 각 2편의 <아리랑>대본이 발표되었고, 이후 1990년에도 합작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 고 최금동 선생 증언과 나봉한 감독 증언. 시나리오는 김보해・나봉한 등이 소장하고 있다.

6) 1985-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서울예술단>의 평양 공연에서 네 가지 ‘아리랑’(진도아리랑・아리랑강남・원산아리랑・전체합창 아리랑)이 불렸다. 이에 대해 북한은 3개월 뒤 각종 매체를 통해 “남측 아리랑은 짜즈화・양풍화되었다.”고 혹평했다. 이때 우리도 북측 공연에 대해 “인해전술식 공연”이었다고 했다.
7) 1986-미8군 제7사단이 미 제24군단 본부인 오끼나와에서 부산에 도착, 팀 스프리트 훈련을 시작할 때는 사단가 <아리랑>(대검가)을 연주했다. 이는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아리랑 악보를 선물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한미군 30년사≫・368쪽・≪동두천시사≫・ 285쪽.
이후 중요 합동군사 훈련에서는 아리랑을 연주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를 북한에서는 “아리랑이 미군의 군화발에 짓밟히고 있다.” <조선신보>・1996.
고 비판해 왔다.
8) 1989-문익환 목사의 방북시 김일성 주석과 아리랑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문목사는 “아리랑은 통일이 되어도 불러야 할텐데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가 좀 어울리지 않지 않습니까?”라고 했는데, 김주석은 “예, 서로 연구해야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9) 1989-제11차 남북체육회담(판문점)에서 단가・호칭・깃발 합의에 앞서 제일 먼저 양측 동일 안(案)으로 논의 없이 합의한 것이 단가를 ‘아리랑’으로 한 것이다(이 회담에서는 단가 합의에 이어 호칭 ‘코리아’, 단기 ‘한반도기’가 합의되었다).
10) 1990-범민족통일음악회에서 <관현악곡아리랑> 연주로 문을 열고 행사 기간동안에 <독창아리랑>・관현악 <밀양아리랑>・관현악에 의한 합창 <아리랑> 등이 공연되었다.
11) 1990-‘90송년음악회’에서 북한 평양민족음악단의 ‘아리랑련곡’ 등 공연(단장 성동춘, 총 30명 12월 9일).
12) 1991-남북 단일팀으로 일본 지바현에서 개최된 세계탁구대회에서 처음으로 단가 아리랑이 공식 사용되었다.
13) 1995-북측 아태위와 남측 <SN21> 김보애 회장과 영화 <아리랑> 합작 합의.
14) 1998-북한 <윤이상통일음악회>에서 <관현악곡아리랑>을 남측의 박범훈이 지휘하고 평양국립교향악단이 연주했다. 이 같은 납북간의 교차 연주는 처음이다.
15) 1998-북측, 판문점에서 “노래도 하나, 춤도 하나, 소원도 하나다.”라는 구호 아래 개최된 <통일예술축전>에서 ‘아리랑’으로 문을 열었다. “축전 시작을 알리자 <아리랑>의 선율이 울려 퍼지는 속에 북남 해외대표들이 대형 축등 밑에 드리운 삼색 댕기를 당겨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라고 쓴 플랜카드를 내렸다.”
16) 1999년-북한 원음에 의한 <북한아리랑>이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와 신나라 레코드에 의해 C·D로 발매되었다. 최초의 공식적인 음악교류이다.
17) 2000-ASEM에서 국빈 입장 때 아리랑 연주, 동 기념음악회에서 김홍재 첫 지휘 <관현악곡아리랑> 연주.
18) 2000-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중, 공식 음악회 첫 순서에서 최성환 작곡의 <관현악곡아리랑>을 연주했다. 이는 북측이 이 작품을 의전(儀典)음악으로 쓰고 있음을 알게 한다.
19) 2000-호주 시드니올림픽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선수가 개폐회식 공동 입장, 이 때 단가로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이를 북한 중앙방송은 16일 정오 뉴스로 방송했다.
20) 2000-평양 국립교향악단의 서울 공연시 첫 레파토리를 <관현악곡아리랑>으로 하겠다고 했고, 4회 공연 모두에서 첫 순서로 연주했다.
21) 2000-북한 조명록 특사 미국 방문시, 미국측이 준비한 만찬장에서 ‘아리랑’을 연주했다. 이는 위의 5)에 대비하면 주목되는 사실이다.
22) 2001-북한 <통일을 여는 대축전>, 처음으로 미국 순회공연, <관현악곡아리랑> 연주됨(2월 14일~24일, 뉴욕 외 4개 도시).
23) 2001-김연자, 남측 가수로는 처음 독자공연, 이때 ‘영암아리랑’과 ‘홀로아리랑’ 등을 부름(4월 15일).
24) 2001-김대통령 몽골국 공식 방문 인사말에서 “세계에서 몽골의 여러분만이 한국의 아리랑 노래를 구성지게 부를 수 있다.”고 했다.
25) 2001-평양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게양하며 아리랑을 연주했고, 여성4중창 ‘통일아리랑’이 불렸다. 폐막식에서는 군중무용 <통일아리랑>이 공연되었다(8월16일).
26) 2001-민단 강동춘 지휘, 총련 로상현(피아니스트)이 주관한 최초 합동공연 ‘아리랑이 연결하는 남북’ 공연 개최.
27) 2001-세계유네스코 제31차 총회에서 제1회 <아리랑PRIZE>시상.
28) 2001-북한 2002년 4월 말에서 6월 말까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개최 예정을 보도함.

이상의 아리랑 관련 상황만으로도 아리랑이 남북정치 상황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아리랑이 실마리가 되어 남북 동질성 회복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제 본고에서는 북한과 중국과 일본 동포 사회의 각종 자료,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국내 소재의 문헌과 음반 자료 등을 통해 다음의 논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첫째, 북한의 아리랑 실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둘째, 이에 대한 각각의 평가와 분석을 통해
셋째, 북한의 아리랑에 대한 인식(위상)을 확인한다.
넷째, 그리고 이를 통해서 교류와 문화 통합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아리랑의 역사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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