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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김산 연보
김산 연보는 이번에 <김산평전>을 내신 이원규선생의 연구 조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항일 독립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대하소설을 쓰면서 거의 모든 독립투쟁 현장을 답사한 바 있다. 특히 역사에서 묻혀진 사회주의 계열 항일투사들의 투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긴 시간의 연구 조사를 통해 그것들을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지난해 ■■약산 김원봉■■를 출간한 데 이어 이 책을 내게 되었다.
 
김산연보

-1905년(1세)
*5월 12일(음력 3월 10일), 그의 가족이 평안북도 용천군의 한 산 속에서 러일전쟁을 피해 있던 중 태어나다. 집은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 289번지에 있었으며 하장동은 인동장씨 집성촌이었다.

-1910년(6세)
*어머니를 따라 인근의 예배당에 다니다.
*8월, 경술국치를 당해 어른들이 탄식하고 통곡하는 것을 보다.

-1911년(7세)
*어머니가 예방주사를 안 맞았다고 일본 순사가 와서 심하게 구타하다. 그때 일본인을 처음 보다. 독립투사 이동휘를 영웅으로 생각하며 성장하다.

-1912년(8세)
*봄, 고향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용암포보통학교로 추정됨.

-1916년(12세)
*겨울, 마을아이와 싸운 뒤 가출하여 용암포의 친구 친척집에서 기숙하다.

-1917년(13세)
*작은형의 집에 머물며 중학입시 공부를 하다.

-1918년(14세)
*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다.
  
  -1919년(15세)
*3월 7일, 만시시위에 참가하여 3일간 구금되고 학교에서 제적당하다.
*봄, 작은형이 의학공부를 하라고 100원을 주어 도쿄로 가서 고학하며 대학입시 준비를 하다.  
  *겨울, 모스크바 유학을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작은형이 심부름으로 맡긴 돈 200원을 들고 다시 가출하다. 모스크바로 가려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 봉천을 거쳐 하얼빈까지 갔으나 시베리아 내전과 국제 간섭군의 영향으로 길이 막혀 서간도 신흥무관학교로 가기 위해 만주의 겨울 7백 리를 걷다.
  
  -1920년(16세)
  *1월,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 안동식 장로의 집에 기숙하다. 안 장로의 딸 미삼을 만나다.
  *3월, 통화현 합니하로 가서 나이가 어린데도 특별한 배려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다.
  *6월, 삼원보로 돌아가 소학교 교사로 일하다.
  *12월,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 소년시절에 흠모한 이동휘를 만나다. 확실한 민족주의자가 되었으며, 흥사단에 가입하고 인성학교에서 야간에 영어와 에스페란토어를 공부하다. 삼원보 안동식 장로 일가가 일본군에 학살당하고 미삼이 행방불명된 소식을 듣다.
  
  -1921년(17세)
  *1월, 일생에 영향을 준 테러리스트 오성륜을 만나고 의열단에 가입하다. 톨스토이와 아나키즘 이론에 도취하고 아나키스트로 변모하다.
  *10월, 도산 안창호의 주선으로 천진의 남개대학에 특대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운동회 날의 우발적 사고로 자진 퇴학하다. 이후 북경 교외 향산고아원에 머물다가 작은형이 보낸 여비를 받아 귀국해 고향에 머물다.
  *겨울, 작은형이 학비를 대줘 다시 북경으로 가다.

  -1922년(18세)
  *봄, 북경 협화의학원에 입학하다. 조선인 좌파 유학생 그룹인 한인학생동맹에 가입하고 「공산당 선언」,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사회발전사화」 등 논문을 읽다.
  *상해에 가서 의열단과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만나다.
  *북경으로 돌아오면서 조국독립의 꿈을 실현할 생각을 갖다.

  -1923년(19세)
  *겨울,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다. 김성숙과 함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단체 창일당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을 발간하다.

  -1924년(20세)
  *코민테른 특사 보이틴스키와 중국공산당 창시자 이대소를 만나다.
  *겨울, 조선공산당(이르쿠츠크파) 북경지부를 설립하다.
  
  -1925년(21세)
  *가을, 앞서 간 김성숙을 찾아 손문의 호법정부가 세워진 광동으로 가다. 국민당 정부의 배려로 국립광동대학 의학과 본과 2학년에 편입하다.
  *11월, 북경의 조선인 진보단체들이 북경사회과학원을 설립하고 장지락을 사교부에 배치, 김산은 참석 못하다.
  *겨울,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다. 중국 공산당내의 조선인 세포로 들어가라는 명령 받고 거기에 들어가다.
  *이 해, 조선인 지도자, 청년 학생 들 천 명 이상이 중국 혁명에 참가하려고 광주에 오다.
  
  -1926년(22세)
  *이 해 초, 한인 독립운동가 모임인 유월한인청년동지회에 가입하다.
  *3월, 3․1운동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중국인들에게 3․1운동을 알리다.  
  *늦봄, 광동 조선인 분파를 없애려고 김약산, 김성숙 등과 조선인 사회주의 동맹체인 조선혁명청년동맹을 창립하다.
  *여름, 조선혁명청년동맹 기관지 ■■혁명동맹■■의 부주필로서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하다. 조선인들의 분파를 없애려고 각 그룹의 공사주의자들을 망라해 KK단을 만들다. 시베리아에서 온 박진 부부와 형제들과 중국인 황평천을 만나 교유하다. 모스크바 유학을 끝내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이 되어 돌아온 오성륜과 재회하다. 오성륜 및 김성숙과 활발하게 교유하다.
  *7월 1일, 국민당 정부가 북벌을 선언하다.
  *8월, 코민테른 대표 미하일과 보로딘을 만나다.
  *9월, 국립광동대학 의학과를 포기하고 법학과 4학년으로 전과하다.

  -1927년(23세)
  *2월, 코민테른 대표인 토마스 만, 자크 도리오, 얼 부라우더를 만나다. 특히 토마스 만과 친밀하게 지내다.
  *4월, 조선혁명청년동맹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을 맡다.
  *4월 15일, 장개석이 상해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이 좌초되다. 광주에도 검거선풍이 몰아치다.
  *4월 18일, 국민당 군대가 광주에서 여성청년단원 나유매를 학살하는 것을 목격하고 시 「동교장의 휴머니티」를 짓다.
  *5월, 작은형이 죽었다는 편지를 받다.
  *8월, 중국공산당이 남창봉기를 일으키고 조선인 청년들이 참가하다.
  *12월 11일, 김성숙, 오성륜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하다.      
  *12월 13일, 중산대학에서 조선청년연맹회의를 열고 봉기 실패 이후 진로를 논의하다.
  *12월 14일, 광주 코뮌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이후 화현과 종화현을 거치며 패퇴하다. 무명의 여병사가 동행하다.

  -1928년(24세)
  *1월 7일, 해륙풍 소비에트에 도착하다.
  *1월 21일, 중국공산당 동강특별위원회 당학교가 설립되자 장북성이라는 이름으로 교무위윈회를 맡고 공산주의 이론과 중국공산당사를 강의하다. 재판위원으로 반동 인물의 재판에 참석하다.
  *2월~6월, 해륙풍 방위를 위한 다섯 번의 전투에 참가하며 무수히 죽음의 위기를 넘다. 말라리아에 걸리다.
  *7월 27일, 산두에서 지하당 연락처를 찾다.
  *8월 6일, 지하당원의 안내로 삼양 부근 어촌에 도착, 이틀 뒤 해륙풍 지역 탈출에 성공하다.
  *8월 6일, 홍콩에 도착하여 인삼장수 박 씨의 도움을 받다.
  *9월 초순, 상해에 도착했으나 과로와 말라리아로 동인의원에 입원하다.
  *10월, 김성숙을 만나고 그처럼 해륙풍에서 생환한 오성륜도 만나다.
  *11월, 조선공산당 출신 한위건의 중국공산당 입당을 거부하다.      

  -1929년(25세)
  *연초에, 북경으로 가다.
  *3월, 박용만을 저격 살해한 의열단원 이해명의 재판에 독립당 대표 자격을 갖고 증인으로 참석하다.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윈회 조직부장이 되다.
  *3월,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집회에 참석해 반대 발언을 하다가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고 입원하다.
  *4월 1일, 사노 마노부의 ■■무신론■■을 번역 출간하다.
  *4월, 중국공산당 중앙의 요청으로 만주지역 조선인 공산당원들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통합 가입시키기 위해 만주에 밀파되다. 봉천에서 만주성위원회와 협의하고 반석현 호란집자에서 열린 한인청년연맹 제2차 대표회의에 참석하다.
  *8월, 재만조선농민동맹 제3회 대표회의에 참석하다. 이후 만주지역을 잠행하며 조선인 항일전선 조직을 강화하는 공작을 하다.  
  *10월 26일, 조선일보 등 국내 신문들, 장지락 외 3명이 동포청년에게 살해되었다고 이른바 북경 살인사건을 보도하다.
  *11월 6일, 조선일보사를 거쳐 신간회 진상조사위원에 북경살인사건이 낭설이며 자신은 살아 있다고 답변한 서신이 ■■조선일보■■에 게재되다. 이로써 그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지다.
  *겨울, 압록강변 안동에서 비밀공작을 하다.

  -1930년(26세)
  *1월초, 북경으로 돌아오다. 지난해 지도한 북경의 대학생 그룹에 속했던 제숙영과 동거를 시작하다. 다시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을 맡다.
  *3월, 단편소설 「기묘한 무기」를 집필해 ■■신동방■■ 제1권 제4기에 기고하다. 북경 군벌정부의 3․18 학살을 규탄하는 북경 청년학생 시위행진을 조직하다.
  *4월 20일, 북경시 메이데이 경축행사 준비회의에 참석하고 학생과 노동자 시위를 지휘하다. 애인 제숙영 등 50여 명이 체포되다.
  *6월, 공산당 북경시위원회가 향산지역에 만든 당원 훈련소에서 유자재라는 가명으로 제숙영과 같이 강의하다.
  *6월 27일, 광주 코뮌 시절의 동지 한해(장일진)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추모시를 쓰다.
  *가을, 한위건이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원회에 입단청원을 냈으나 다시 거부하다.
  *11월 20일, 유청화라는 가명으로 광주 봉기 3주년 기념행사 준비회의에 참가하러 북경 서성구역 공과대학 근처 공동주택에 갔다가 북경 정부 공안요원들에게 체포당하다.
  *12월 5일, 군벌정부 공안국의 요구대로 자술서를 쓰다.

  -1931년(27세)
  *1월 7일, 일본 대사관에 인도되다. 이후 천진주재 일본 총영사관으로 압송되다.  
  *1월 14일, 일본 총영사 대리 다지리로부터 ‘오늘부터 앞으로 3년 간 장지학이 중국에 머무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받다
  *2월 20일, 대련과 안동을 거쳐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어 40여 일간 고문 취조를 받다. 여섯 차례 물고문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고 폐결핵에 걸리다.
  *4월 1일, 신의주 형무소에서 무혐의로 석방되고 고향집에서 요양하다.
  *6월, 북경으로 돌아갔으나 일제에 굴복해 변절했다는 혐의로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당하고 동지들로부터 불신을 받다. 그의 부재 중 입당한 한위건의 계략이 작용했음을 알고 분노하다. 중국 군벌정부의 공산당 검거 바람이 불고 해정구 선연교의 김기창 선생 집에 숨다.
  *당적 회복과 명예 회복을 위해 당에 공개심사회를 요구, 심사회에서 한위건과 논쟁하다. 심사회가 무죄를 결정하여 명예는 회복되었으나 당적은 회복하지 못하다. 설상가상으로 이립삼주의자로 몰리다.
  *광산에서 육체노동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가구로 갔으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되다.
  *당의 승인으로 북경으로 돌아왔으나 폐결핵이 악화되고 일자리와 수입이 없어 심신이 피폐해지다. 복수하려고 칼을 들고 한위건을 찾아갔으나 찌르지 못하고 돌아오다.
  *겨울,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제자이자 동지인 조아평의 보살핌으로 일어서다.

  -1932년(28세)
  *1월, 북경 남서쪽 보정의 하북성 제2사범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공산당 비밀조직을 만들다.
  *3월, 공안국 요원들의 체포를 피해 고양현 북신장으로 가서 소학교 교원으로 일하며 농민조직을 만들다. 사노 마나부의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 레닌의 일생■■을 번역하다.
  *7월, 공산당 하북성 위원회로부터 농민조직으로 봉기를 일으키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하다.
  *8월 1일, 사노 마노부의 ■■포이어 바흐, 마르크스, 레닌의 인생관■■을 번역 출간하다.
  *8월 27일, 고양현과 여현에서 농민군이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다. 동지 25명과 함께 맹목적 봉기를 비판하는 의견서를 보내고 트로츠키 파로 몰리다.
  *가을, 북경으로 돌아가 경산 동가 삼안정 26번지에 셋방을 얻고 「일본 정치의 봉건주의」, 「독일 총통의 권력」 등을 번역해 황야(荒野)라는 필명으로 ■■국제역보(國際譯報)■■에 기고하다.

  -1933년(29세)
  *5월 1일, 북경시 서성구 서철장 15호 하숙에서 조아평과 함께 체포되다.
  *5월 7일, 공안국에서 「나의 고백」이라는 자술서를 작성하다.
  *6월 15일, 일본 측에 넘겨지고 그 후 천진영사관으로 압송되어 강제노역형을 받다.
  *6월 하순, 조아평이 면회 오다.
  *7월 30일, 고국으로 압송되다.
  *8월, 석방되어 고향집으로 가다.

  -1934년(30세)  
  *1월, 다시 국내를 탈출해 북경에 도착하다.
  *봄, 당 조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상태에서 조아평과 결혼하다. 이후 가정교사, 대리 집필, 번역 등으로 돈을 벌다.

  -1935년(31세)  
  *봄, 아내와 함께 북경 남쪽 도시 석가장으로 가서 신문 편집을 맡다. 이후 철도 노동자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다. 제자들은 입당했으나 당적 회복은 보류되다.
  *8월 1일, 중국공산당이 「항일구국에 관하여 전국 동포에게 권함」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다.
  *12월 9일, 석가장의 청년학생 노동자들을 규합, 8․1선언을 지지하는 시위를 이끌다.
  *12월 19일, 한위건이 공산당 천진시위윈회 서기 겸 하북성위원회 서기로서 대규모 시위를 이끌다.
  *12월, 김성숙의 편지를 받고 상해로 가서 동지들과 함께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를 잃어버릴 처지가 못 된다’는 선언문을 내고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여 중앙위원이 되다. 생애를 민족 독립을 위해 살 것임을 다시 확인하다.    

  -1936년(32세)
  *4월, 남경으로 가서 나청의 집에 묵다. 이유민을 만나 의논했으나 당적 회복의 길을 찾지 못한 채 나청, 동포 음악가 지망생 정률성과 가깝게 지내다. 아내가 석가장에서 와서 함께 머물다.  
  *8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 지휘부가 있는 보안으로 떠나다.
  *10월, 서안에서 홍군 밀사의 안내를 받아 연안까지 가고 거기서 혼자 보안까지 가서 두 달을 앓아눕다.
  *12월, 중국공산당 중앙과 홍군 지휘부가 이동함에 따라 연안으로 가다.

  -1937년(33세)
  *1월,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사와 물리, 화학을 강의하다.
  *4월, 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서기 한위건이 당 중앙에서 소집하는 서북지역 당대표회의와 백색구역공작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연안에 오다. 그와 해후가 이뤄지다.  
  *4월 12~19일, 서북지역 당대표회의가 연안에서 열리고 장명이라는 이름으로 참석하여 연설하다. 동포 청년 서휘를 만나다.
  *4월 20일 하북성 안국현 친정에 머물고 있던 아내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는 편지가 오고 답신을 보내다.
  *5월 헬렌 포스터 스노, 서안 봉쇄선을 돌파하여 연안에 도착하다.
  *6월 18일, 헬렌 포스터 스노와 인터뷰를 시작하다. 이후 2개월간 22차에 걸쳐 만나다.
  *7월 10일, 한위건이 연안에서 장질부사로 사망하다
  *7월 28일,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다.
  *7월, 제숙영의 요청으로 장소가 서안 팔로군 판사처에 가서 엽검영에게 장지락의 안부를묻고 ‘그는 지금 연안에서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는 답을 듣다.
  *9월, 조선인 혁명가 김찬이 아내 도개손과 함께 연안에 오다.
  *11월, 강생이 연안에 와서 당 중앙 조직부장 자리에 앉다.
  *12월,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당 중앙에 상신하다.

  -1938년(34세)
  *1월, 강생이 공산당 기관지 ■■해방■■에 트로츠키 비적을 제거하자는 글을 기고, 대숙청을 예고하다. 조선인 혁명가 김찬 부부가 일제 간첩 혐의로 연안에서 체포되다.
  *4월, 모택동의 정적이었던 장국도가 연안을 탈출해 국민당 쪽으로 전향하여 대숙청의 조짐이 더 커지다.
  *8월, 섬감녕변구 보안처가 ‘장지락은 일본 침략자의 간첩이므로 제 고향에 보내야 한다’고 당 중앙에 보고하다.
  *9월, 중공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반동분자 숙청공작을 중요 의제로 선택하다.
  *10월 초순,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다.
  *10월 8일, 강생이 장지락을 비밀로 사형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하다.
  *10월 19일, 전선으로 가는 도중 처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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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2일 (목) 20:56   한겨레

“아리랑의 지평 5배까지 넓혔습니다”


[한겨레] 인터뷰/<김삼 평전> 쓴 이원규씨

님 웨일즈와 김산 공동저작으로 돼 있는 <아리랑> 2005년 개정 3판에는 1991년에 쓴 리영희 선생 추천사가 그대로 실려 있다. “이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지난 30년의 지적·사상적 암흑 속에서 가끔 <아리랑>을 펼치는 것은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모색하다 지치고 좌절 때문에 실의했을 때는 ‘김산’을 찾았다. 그는 내가 감히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나에게 빛이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곤 했다.” 추천사는 이렇게 끝난다. “그 두 사람(김산과 웨일즈)의 만남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그것은 이 민족(또는 동양)의 혁명운동사에 큰 사건으로 남아야 할 우연인 셈이다.”

1938년 중국공산당 극좌노선을 대표하는 캉성(강생)의 과오로 33살 한창 나이에 희생당한 조선인 항일혁명운동 지도자 장지락(1930년에 붙잡혀 톈진의 일본영사관에서 찍은 사진에는 ‘장지학’으로 돼 있다). <아리랑>을 통해 김산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조선 독립운동사에 명멸한 수많은 인물들 중 아마 지금의 한국인들로부터 가장 주목받고 사랑받는 인물 가운데 한사람일 것이다.

스테디셀러 <아리랑>은 1941년 미국에서 발행된 뒤 43년만인 84년에야 한국에서 처음 번역출간됐다. 그리고 다시 22년이 지난 이제 김산에 관한 본격적인 평전이 처음 나왔다. 실천문학사가 ‘역사인물찾기 시리즈’ 20번째로 내놓은 <김산 평전>. 저자 이원규(59)씨는 “<아리랑> 등 김산에 관한 기존 책들이 쌓아올리고 펼쳐놓은 지평을 적어도 3배 이상 넓혀 놓을 자신, 말하자면 명백한 차별성을 드러낼 자신이 없으면 쓰지 않는다”는 각오로 도전했고, “최대 5배까지 넓혔다”고 장담했다. 웨일즈만 하더라도 당시 조선과 조선인 독립운동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었고 20여 차례에 걸친 김산과의 인터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비록 그의 기록이 중국혁명운동 역사기록과 맞춰보더라도 놀랄만큼 정확하다는 건 확인됐으나, 당시 상황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내용들을 두루 풍부하게 담긴 어려웠을 것이다. 평전은 웨일즈로선 손댈 수 없었던 김산의 최후까지를, “아직 아쉬운 수준이지만” 나름대로 복원했고, 그가 사랑한 여성들과 아들들 얘기, 캉성의 최후 등 현지답사와 새 자료발굴로 얻은 성과들을 충실히 담아냈다.

<월간문학> 등의 등단작가인 저자는 지난해엔 <약산 김원봉>을 출간했다. 이들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들을 되살려 놓는 작업에 그가 특별히 힘을 쏟는 데는 사연이 있다. “냉전과 분단구도에 길들여져 있던 60년대 말 학번인 우리 세대에게 <아리랑> 출간은 충격이었다. 김학철의 <격정시대>와 <아리랑> 등은 우리 항일운동사의 절반이 저쪽에 있다는 생각을 되새기게 했다.” 중국과 수교하기 전인 90년대 초부터 아마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연안과 태항산 등 중국내의 조선인 항일무장세력 활동지들을 부지런히 찾았다. 때로 억류까지 당하면서 스무번 가까이 중국을 찾았고 시베리아도 훑었다. 그걸 토대로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등을 썼고 ‘항일운동사 전문가’, ‘현장을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 됐다.

“<아리랑> 등은 (우리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는) 정신적 열패감을 씻어주었습니다. 저 너머에 우리가 몰랐던 많은 사실들이 었었던거죠.” 그렇게 다니면서 3·1만세운동의 풍운아 한위건, 오성륜, 양세봉, 김원봉, 그리고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작은 영웅’들을 새로 만났다. 그가 보기에 비록 비운의 희생자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리랑>으로 남은 “김산은 행운아”다. 김산이 사랑받게 된 것은, 그가 보기엔 제대로 된 독립운동가들 전기나 평전이 따로 거의 없는 데다 웨일즈라는 외국 여성작가가 개입된 극적인 요소, 그리고 김산 개인의 역사적 체험과 인물됨 등이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다.

“북한조차 항일무장운동사는 제대로 정리가 돼 있지 않는 것 같다. 남과 북은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빼내 이용해먹었다. 항일독립운동사마저 분단돼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후학들이여, 나를 밟고 나아가라.”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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