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페이지 1
 


  기미양(2009-08-06 15:32:43, Hit : 861, Vote : 74
 대마도아리랑-한빛코리아

한빛코리아 www.hanbitkorea.com


대마도는 우리땅


작 사 : 최 동 국
노 래 : 아 랑


아~ 아~ 우리의 아리랑과 무궁화꽃 노래가
항상 울려 퍼지는 곳
우리의 섬 대마도...

아~ 부산의 야경이 아름답게 보이는
우리의 섬 대마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조상 대대로 우리의 은혜를 입은 곳
대마도....

우리의 땅 이곳은 언제부터 음~
왜인들이 차지하여
왜구들의 소굴이 되었는가..

한맺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부터 쓰시마란 이름으로 바뀌어
침략자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는가..

(2절)
이승만 대통령이 반환하라 외쳤던
우리의 섬 대마도..
왜구들의 소굴이 되었는가...

(반복)침략자 일본은 들어라.
그대들의 스승 호오슈의
위대한 뜻을 기억하며 대마도를 반환하라.

우리의 섬. 대마도!


(PS)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 준비를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외세에 침략당하고, 지배당하고, 압력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오랜기간동안 잃어버렸던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독도 수호에 매달리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야합니까?

위의 "대마도는 우리땅" 노래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되어있습니다.
이 노래와 가사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작사 배경 >

안녕하십니까? '대마도는 우리땅'의 작사 및 제작자인 최동국입니다.
본 곡의 작사 및 제작 배경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1. 독도 문제

일제는 '청일 전쟁'(1894년) 승리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위해 '러일전쟁'(1904년 2월)을 일으켰다. 일본 해군은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1904년 군함을 파견하여 그 준비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05년 2월 '무주지(無主地) 영토편입' 형태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竹島'라 명명함.)하였고, 러일 전쟁이 1905년 9월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자 1905년 11월 '을사 5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였고, 1910년 한일합병에 의해 대한제국은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즉,'일본의 독도 불법 침탈'은 대한제국 '한반도 전국토의 식민지화'와 바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최근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 자체가 1905년 일제의 불법적 독도 침탈 시도를 오늘날로 연장시키는 신제국주의 외교정책이며 팽창주의 정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독도 문제'는 일본의 신제국주의 외교정책으로 발생한 '민족적인 문제' 임을 명심하고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대책을 수립, 실행하여 우리 후손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대마도 영유권 문제

<대마도의 자연 조건>

대마도는 부산에서 53km, 일본의 규슈 혼도(九州本島)에서는 147km나 떨어져 있는 일본보다는 한국쪽에 더 가깝게 위치해 있으며, 그 크기는 거제도의 두배 정도 된다. 섬 전체의 92 %가 산악 지역으로 되어 있으며 농사 가능한 면적은 섬 전체의 3%에 불과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살기 어려운 자연 조건이 척박한 섬으로써, 식량을 외부에서 조달해야만 되는 섬이다.

<대마도의 역사 개괄>

'고려시대' 중엽부터 '진봉선 무역(進奉船貿易) 체제' 하에서 대마도는 고려에 종속되어, 고려는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대마도 구당관(對馬島 當官)'이라는 고려 관직과 '만호(萬戶)'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주는 등 정치, 경제적으로 대마도는 고려에 속했으나, 고려말 여몽 연합군의 대마도 및 일본 정벌과 일본 내부의 사정으로 인한 고려와 대마도의 관계 단절로 인하여 대마도인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왜구'로 변질되어 고려말 수많은 약탈을 행하였고, 고려말 이후에도 대마도는 왜구의 소굴(근거지)이 되어 조선 연안 및 중국 남부 해안에서 많은 약탈을 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왜구 근절의 목적으로 수 차례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이후 '수직왜인(受職倭人)(조선 정부로부터 관직을 제수 받은 왜인)' 제도 및 고려 시대의 진봉선 무역과 유사한 '세견선 무역' 등의 체제하에서 다시 대마도는 조선에 종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말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하여
조선의 지리 및 실정을 정확히 아는 대마도는 '임진왜란 침략의 전진기지'가 되어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대마도는 '쓰시마'란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고 조선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대마도는 완전히 일본 정부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

1949년 1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는 건국직후인 1948년 8월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한후 일본측에서 물의가 일자 9월에 다시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후에도 거듭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하였으나 일본측의 항의와 당시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3. 독도와 대마도의 영유권 문제 연계 전략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대마도 영유권' 주장은 훨씬 시기적 연원도 깊고 자료도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지금 부터라도 대마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 노력 및 전국민적인 관심을 쏟아야 하며 일본이 독도문제를 제기할 때 마다 우리는 '대마도 영유권' 주장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즉, 한일간의 역사를 볼 때 우리는 반드시 '공세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고 '대마도 영유권' 문제를 현재의 독도와 같은 외교적인 문제로 만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부산일보[이 주일의 역사] 비운의 혁명가 김산(1938.10.19)
축사 - 혁명가의 노래, 김산의 <옥중가아리랑>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zero

 아리랑나라
서울시 종로구 권농동 127-4 유성빌딩 4f

tell:02-763(762)-5014 010-4764-8844

Email : kibad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