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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2004-07-10 14:07:15, Hit : 1946, Vote :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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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

과 목 명 : 한국근현대사
   제 출 일 : 1999년 10월 7일
   학    번 : 도시공학과
              1997003076
   성    명 : 이  인  무

  본 책에 나와 있는 김산의 말에 담긴 뜻과 행동이 우리 나라의 공산주의 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지는 모르나, 그의 말과 행동에서 우리 나라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의 지배 계급에는 두 가지의 중대한 고민거리가 있다. 하나는 어떻게 좀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를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민중과 조선 민중이 협력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한 상황에서 이 두 집단의 협력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일본 내에서 지배 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이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활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계층에 대한 거부감 혹은 배척의식에서 발로가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나라에서도 역사적으로 계속 유지되어 오던 지주 계층과 농민 계층관계를 볼 때, 농민 계층의 지주 계층에 대한 불만이 사회적 문제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 당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농민들의 수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이러한 투쟁의 대부분에 실패가 농민 계층에게 지배계층을 타도하자는 공산주의의 정신이 쉽게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김산은 1919년 조선을 떠나오면서, 3.1운동에 대한 어리석음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즉, 조선인의 3.1운동은 세계 열강을 향해 국제 정의와 민족자결주의의 약속 이행을 애원한 어리석은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도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사람들처럼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할 것을 다짐했다. 그래서 김산은 투쟁을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귀화하였고, 김산을 비롯한 많은 조선 혁명 운동가들이 중국을 위해 목숨을 잃어갔다. 혁명 운동가의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이거나 혁신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그들 말처럼 열렬한 투쟁의식을 왜 중국을 위해 받쳐야만 할까? 물론 좀 더 확실한 혁명가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의 독립 이전에 중국의 자립이 우선이 되어야 할 이유는 미비하다. 이것이 3.1운동 때에 세계 열강을 향해 외치던 것과 외세 의존이라는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들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3.1운동 당시 일제에 대항한 승려들의 행동을 보고 어떤 특정한 단계에서는 종교가 단순한 정신적 도락이 아니라 실천적인 사회 이상주의가 된다고 인식하였다. 반면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승리를 위해 행동하지 않고, 단지 기도만 하고 앉아 있는 모습 속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불교를 신을 믿는 종교라는 의미에서 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으로만 인식을 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자국 내에서의 종교 활동을 금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국가를 오랫동안 자신의 것으로 지켜나가기 위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종교 활동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집회를 통한 배반 세력을 막기 위함이다. 이는 일제가 우리 나라에 침략 해 왔을 때, 교회당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와 같을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교회를 경멸하다시피 한 이유는 종교를 금기시하는 선진 공산국가의 정책적인 결과와 혁명 즉, 행동화를 요구하는 정신이 결합되어 합리화 시킨 것이라고 본다. 또 정신 수양이라는 기독교의 장점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또한 그 당시 불교가 반일적인 성향이 강했던 이유는 일에 의한 토지의 약탈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항일운동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했던 것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종교에 대한 시선은 너무나도 자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좋은 단체였다. 하지만, 임시정부 위원회는 아메리카 파와 시베리아-만주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 두 집단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목적은 같았으나, 그 방법 면에서 큰 차이점을 보였다. 아메리카 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여 외교적 수단을 통한 운동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시베리아-만주파는 이동휘 장군을 주축으로 하는 집단으로 왜와의 전쟁을 통한 투쟁을 주장하였다. 이에 시베리아-만주파의 이동휘 장군은 결국 임시정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였다.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이데올로기 문제를 제외하고는 비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새로이 조직한 민족주의 정당이 임시정부에 지나치게 대항을 하였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임시정부측의 잘못도 있겠지만, 이 두 단체의 대립은 결국 임시정부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정당 둘 모두 우리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되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이 대립을 한 이유는 분파와 대립을 없애고 공동 행동을 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을 둘 수 있다. 이 조직 내에서 김산을 비롯한 3명의 운동가는 K.K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여러 분파를 없애기로 하였고 결국은 분파를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K.K라는 것도 하나의 단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분파를 없앤 후에 단체를 해체하기로 했으나, 나중에는 K.K의 조직원 80명 내에서 암살이 일어나는 등 분파가 일어났다. 이것은 공산주의라는 논리 속에 존재하는 오류라 생각된다. 공산주의 기본 개념은 지배층이 없는 완전 평등을 이루는 사회이다. 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앞서나가는 조직이 있어야 하고, 나중에는 새로운 지배 계층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것으로 볼 때 폭력을 제압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그런 논리적 오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 운동은 대부분 국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만주나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이 엄격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국내의 지하조직망 구축 뿐만 아니라, 좀 더 효율적인 조직구성과 일제의 탄압에 대한 적절한 행동이 나타났어야 했다. 또 잠시 국외 활동을 하였다 하더라도 국외에 주축이 될 수 있는 단체가 있었어야 했고, 빠른 시간 내에 국내 진입을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과 소련의 단체 속에 조선 지부를 조직하여 그들 스스로의 중앙 단체 조직에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을 위해 너무 치우쳤다고 생각된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독립적으로 조직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21에 ‘흑색 청년동맹’이다. 그러나 이 단체는 1924년 세 갈래로 분열되고, 이들 중 대부분은 공산주의의 체계 속에 흡수되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조선 내의 대중운동의 발전이다. 일반적으로 대중활동이 일어나기 어려운 곳에서는 무정부주의와 마찬가지로 테러리즘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대중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테러리즘은 사라지고, 대중적인 정치활동에 가담하기를 원했던 혁명가들이 늘어갔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일본은 대중활동을 탄압하지 않고 테러리스트를 박멸함으로서 극으로 치달았던 수 많은 좌익세력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교묘한 탄압정책이었고 그들은 이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이다.

  1930년 초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침체기에 들어갔다. 이  당시 국내의 공산주의 확대를 위해 그들은 아직도 북경의 지령에 따르고 있었다. 김산이 무장봉기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결국은 봉기를 도왔고, 그에 대한 결과는 참패였다. 무장봉기를 계획했던 것도 문제이지만, 이 당시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이 이 봉기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주지해 볼 일이다. 일의 통치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면서, 농민들에게 이에 대한 이면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시켜 주지 못했다.

  김산의 지도자에 대한 필요요건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다. 지도자는 다수의 추종자를 얻기 전에는 진정으로 지도할 권리를 가질 수 없다 하였다. 또한 자기 시대를 앞서 있다는 것은 비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에 불과할 뿐, 지도할 자격은 없는 것이라 했다. 즉, 진정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앞서 가는 것보다는 현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정한 지도자는 대중을 쫓아가서 앞으로 밀어 주어야 하지, 대중을 밧줄로 잡아끌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여론에 대한 의견존중. 대중에 대한 평등의식. 이러한 기본 사상이 지도자를 대중의 밑거름으로 파악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이것은 초기 공산국가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아니, 어쩌면 이들이 말하는 진정한 지도자라면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다 할 때까지 대중의 뜻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일 뿐이다. 권력에 대한 욕심, 재력에 대한 욕심 등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게 되 버린다. 이런 우려에 대해 김산은 지도자의 도덕적 용감성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대해 강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불확실한 인간 도덕성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 나라의 현실은 공산주의가 사상적인 면에서 충분히 수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 등의 국제적 여건과 국내 공산주의 혁명 운동가의 외세 의존적 성향은 결국 실패의 결과를 맛보게 되었다.







[주목! 이 프로] '아리랑' 주인공 김산의 삶
<백범일지>와 <아리랑>에서 나타난 김구와 김산의 독립운동노선의 차이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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