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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미양(2006-03-24 15:27:12, Hit : 1271, Vote :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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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의 최후를 아는가?-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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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gute57)

‘아리랑’의 최후를 아는가



트로츠키파·일제특무·반혁명분자로 몰려 죽은 김산의 발자취를 찾아서-2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그는 과연 어떻게 죽었을까?



그의 삶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김산을 인터뷰하여 김산과 함께 <아리랑>의 공동저자가 된 님 웨일스 역시

옌안을 떠난 뒤로 김산의 뒷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



혹자는 김산의 경력으로 볼 때

해방 뒤 북한에 돌아왔다가 연안파들이 숙청될 때 같이 숙청되었을 것이라고도 했고,



또 님 웨일스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병약해진 김산이 어디선가 병사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혁명가로서의 김산의 치열한 삶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가 만주로 가서 항일전쟁에 동참하였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던 그의 죽음에 대해

신빙성 있는 서술이 나온 것은



뒤늦게 1986년이 되어서였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나마 공식 역사서술에 등장한 것은



료녕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조선족항일렬사전> 제2권에 실린



권립(權立) 선생의 글을 통해서였다.





“1938년도에 섬감녕변구(陝甘寧邊區) 보안처에서는

김산 동지의 역사를 심사하였다.



‘반역자가 아닐까?’

‘일제특무가 아닐까?’

‘트로츠키파가 아닐까?’하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심사하였지만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었다.











이에 강생(康生 - 캉성)은

비밀리에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산 동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 그는 33살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중국혁명에 바친

탁월한 조선인 혁명가요 국제주의자인 김산이



왜 중국혁명의 성지 옌안에서

반혁명분자, 또는 트로츠키파로 몰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지지난해 12월 <아리랑>을 영화화하려는 정지영 감독,

시나리오 작업을 맡은 김석만 교수 등과 함께 옌안을 찾았을 때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러 증언을 통해 볼 때

중국공산당의 당안관(米當 案館 - 기록보관소) 깊숙한 곳에는



김산의 처형을 지시한 캉성의 서명이 담긴 지시서를 비롯하여

상당한 자료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 자료를

김산의 유일한 혈육인 고영광(高英光) 선생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김산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자료가 공개되면 간단히 풀릴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우리 모두는

지금 몇가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이를 힘겹게 짜맞추어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김산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유력한 추론의 하나는



그가 옌안에 오기 직전인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김산이

<아리랑>에 금강산의 붉은 승려로 나오는 김충창, 즉 김규광(金奎光),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조직한

이 단체는



공산주의의 깃발을 내걸었지만

중국공산당이나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다.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볼 때

이 단체를 주도한 인물들은



김규광·박건웅처럼 한때 당원이었다가 광둥 봉기 이후에 스스로 당을 떠났거나,

김산처럼 국민당과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쉽게 풀려나 조직에서 배제된 의심스러운 조선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조직의 출현을 코민테른이 내건 일국일당 원칙에 위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형식논리상으로 보아도

당보다 하위조직인 동맹이란 형태가 일국일당 원칙에 위배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1935년에 거행된 코민테른 7차대회의 정신이

기본적으로 소수민족이나 망명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결성하는 것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주에서는



민생단 사건의 칼바람이 진정되고

재만한인조국광복회라는 조선의 독립과 재만 조선인의 자치를 강령으로 삼는 조직이 결성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김산 등이 이 조직을 결성한 것을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을 중국공산당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중국공산당이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런 감정이 김산의 처형으로 이어졌다는 견해도 근거가 약하다.





1936년 초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은

만주의 조선인 당원들과 유격대원들이



조선민족혁명당 또는 조선인민혁명군과 같은

독자적인 정치·군사 조직의 결성을 허용한 바 있다.



김산이 처형되기 직전인 1938년 9월에도

중국 본토 국민당 지역의 중국공산당에 있던 조선인 당원들을 중심으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만들어진 사실을 볼 때

이런 조직의 결성 자체가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은

김산이 처형된 뒤의 일이지만,



조선인들을 중국공산당 조직 내에만 묻혀 있게 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중국의 항일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조선의용군·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북조선독립동맹 등

통일전선 형태의 외곽조직을 결성하는 데 주력했다.



김산이 트로츠키파로 몰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트로츠키파란 이름은

이미 실제로 트로츠키와 연결되거나 그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는 딱지가 아니라

당 입장에서 볼 때 나쁜 놈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있었다.



김산은

<아리랑>에 실리지 않은 인터뷰 내용을 모은 <아리랑2>에서

자신이 트로츠키파 또는 우익, 심지어는 국민당의 하수인으로 매도되었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일은 김산이 옌안에 오기 전 일이지만,

한번 붙은 딱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광둥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산은



트로츠키와 그 추종자들이

광둥 코뮌을 혁명세력을 파괴하는 무모한 짓으로 비난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등



여러 곳에서 트로츠키를 비판하고 있다.



김산의 삶과 죽음을 추적한 선학들 가운데에는

김산의 사상에 트로츠키의 영향이 짙게 배어난다고 하는 분들도 있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런 분들은

그 논거로 김산이



일본에서 혁명이 먼저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인들이 무장을 들고 참여해야 한다고 한 대목을 들고 있는데,



일본에서의 혁명에 대한 기대는

이미 1920년대와 30년대 우리 민족해방운동가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자료의 부정확성 때문에 가끔 논란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코민테른이 중국공산당에 파견한 군사고문으로



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서양인인 오토 브라운(Otto Braun·중국명은 리더: 李德)의 회고록에는

흥미 있는 대목이 나온다.





오토 브라운이 보기에



님 웨일스와



김산을 님에게 연결시킨 아그네스 스메들리

(홍군 지도자 주더(朱德)의 전기 <위대한 길>의 저자로 당시 옌안의 루신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였음) 등에게서



마오쩌둥(毛澤東)을 신격화하고 민족통일전선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보이는 등

트로츠키주의적 경향을 뚜렷이 느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이 제3자들에게 님 웨일스와 스메들리의 생각과 태도가 ‘도착된 트로츠키주의’라고 빈정댔다고 고백했다.





이런 의심 때문인지

공산주의자인 스메들리는 중국공산당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한 채 1937년 9월 옌안을 떠나야 했다.



오토 브라운은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이라는 권위를 갖고 있었으나



장시(江西)소비에트 시절

마오의 유격전쟁 전략과 충돌을 빚어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서 배척을 받고,



또 장정 기간 모스크바와의 연락도 끊어져

옌안에서 매우 불만스런 나날을 보내었다.



님 웨일스 표현에 따르면

혁명의 성지로 활기찼던 옌안에 웃지 않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김산, 오토 브라운과 스메들리였다.





브라운의 회고록과 님의 회상을 연결하면



트로츠키파로 몰려 입당을 거부당한 스메들리나 죽음까지 당한 김산,

그리고 스메들리를 트로츠키파로 몬 브라운 등 세 사람이



옌안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들이었다.










한편 영화 <아리랑>의 시나리오를 준비중인 김석만 선생이

최근 미국 유타주 브리검 영 대학을 방문하여 님 웨일스 문서를 조사하고 왔는데,



아주 흥미 있는 자료를 발굴했다.



님 웨일스는

김산이 인터뷰가 조금만 길어져도 몹시 피곤해할 정도로 몸이 약해 병사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것을 알고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추론을 했다고 한다.



이 자료는

백선기 선생이 편집한 <미완의 해방노래>에 들어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산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1937년 9월 예난을 떠난 님 웨일스는

이듬해 남편 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와 함께



상하이에 머물고 있는 코민테른의 파견원으로

광둥 코뮌에 참가한 바 있는 하인츠 노이만(Heinz Neumann)을 만났다.



그런데 그는

에드거 스노에게



“네 놈과 네가 쓴 책은 아주 나쁜 거다. 둘 다 없어져야 돼.

내가 박살을 내고야 말겠어”라고 폭언을 퍼붓더니,



님 웨일스에게도 손가락질을 하면서

“네 년도 마찬가지야”라고 험한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뒤 노이만은 옌안으로 가서

마오쩌둥에게 에드거 스노 부부의 험담을 했는데,



마오가

“난 그분들을 잘 알고 있고, 네 놈 속도 훤하게 다 알아,

그러니 어서 꺼져”라고 하면서 옌안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님 웨일스는

어쩌면 김산이 하인츠 노이만을 만났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김산이 노이만을 만났다면

중국공산당으로 보면 혹시 둘이 모택동에 대항하려는 게 아닌가 하여 김산을 없앴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썼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추리긴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능성이 별로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노이만은 1902년 독일 태생으로

김산보다 불과 3살 위였지만,



독일공산당 정치국원,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ECCI) 위원을 지낸 거물로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도한 광둥 코뮌이 실패로 돌아간 후 중국을 떠나



주로 스페인과 스위스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대개의 자료에는

그가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에 체포되어 숙청된 것으로 나오는데,



혹시 그가 1938년도에 중국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이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날이 너무 기울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작 이미 트로츠키파 혐의를 받고 있던 김산에게 그 혐의가 더 가중된 것은

아마도 조선인인 그가 님 웨일스와 자주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님의 남편 에드거 스노는

중국공산당이 확실히 받아들였지만,



아직까지 님 웨일스는

독자적인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오토 브라운 등이 트로츠키파로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님은 특별한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김산에게 불멸의 위치를 부여하기 위해



그를 집중적으로 인터뷰하여

불멸의 명저 <아리랑>을 김산과 함께 남겼지만,



그 불행한 시기에 그런 행동은

김산의 육체적 생명을 단축할 수 있는 것었이다.










님 웨일스는

김산이 처형되었다는 증거가 나온 이후에도 한동안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있던 희망의 땅 옌안에서

처형당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는 저명한 작가 딩링(丁玲)의 말에 의지하여

김산이 병사한 것으로 믿었다.



아마도 딩링 자신이 1942년 정풍운동(整風運動) 당시에 박해를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딩링의 말은 무게를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완에서 발간된 왕지엔민(王健民)의 권위 있는 <중국공산당사>는

당의 내부자료를 인용하여



1937∼39년까지 3년간 섬감녕변구에서만

일제가 보낸 간첩과 반공특무를 100 여명 이상 적발했다고 한다.



이들 체포된 간첩들 대부분이 처형되었음은 물론이다.







딩링이라는 당대 최고의 작가이자 당 선전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정풍운동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캉성이었던 사실은



김산의 죽음과 아울러

공교로운 악연을 보여준다.



그런데 딩링 사건보다도 김산의 죽음을 꼭 빼닮은 것은

정풍운동의 도화선이 된 마오의 유명한 <문예강화>에서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은 왕시웨이(王實味)의 죽음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작의 번역가로서 이름을 떨친 왕시웨이는

<들에 핀 백합(野百合花)>이란 글을 통해



혁명의 성지 옌안에 새로운 특권계급이 싹트고 있다는 글을

딩링이 편집책임을 맡고 있던 당기관지 <해방일보>의 문예면에 발표했다.



그 뒤 왕시웨이는

당적을 박탈당하고 트로츠키파로 몰려 체포되어 한참을 구금되어 있다가,

1947년 3월 진서북(晉西北)으로 부대와 함께 이동하던 중에 총살되었다.



마치 김산이 옌안에서 총살된 것이 아니라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이동중에 총살되었던 것처럼.





김산이 트로츠키파로, 일제특무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죽은 것은

그가 님 웨일스와 인터뷰를 마치고 1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이다.



그 1년간 김산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김산이 님 웨일스를 만나던 1937년 여름과 그가 처형된 1938년 가을 사이에

옌안에서 있었던 최대의 사건은 아마도



1938년 4월 당의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인 장궈타오(張國燾)가 옌안을 탈출하여

국민당 진영에 가담한 일일 것이다.



마오에게는 오랜 정적이던 장궈타오의 탈출이 속으로는 반가운 일이었을지 모르나

중국공산당 전체와 옌안의 대중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이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1938년 9월에 소집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6계(屆)6차 전원회의에서는



당내에 침투한 반당분자, 트로츠키파, 일제 및 반공특무의 적발 등 서간공작(鋤奸工作)이

당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산이 과거 두 차례나 일제와 국민당에 체포되었다가 쉽게 풀려난 사실,



그 자신이 트로츠키파 혐의를 받는 당적이 회복되지 않은 활동가의 처지에서

님 웨일스 등 트로츠키파로 몰린 사람들과 어울린 사실 등이 새롭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김산의 처단을 지시한 캉성은 1937년 11월

그가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 부책임자 역할을 마치고 옌안으로 돌아온 이래



문화혁명이 막바지에 이른 1975년 죽을 때까지 근 40 여년간

중국의 비밀경찰의 총수로서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귀국 뒤 오랜 기간 모스크바에서 같이 일한 왕밍(王明)과 결별하고

마오의 측근이 되었으며,



특히 같은 산둥(山東) 출신의 여배우로 뒤에 마오의 부인이 되어 권세를 휘두른 장칭(江靑)을

마오에게 소개한 인물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참이던 모스크바에 체류했던 사실을

김산을 트로츠키파로 몰아 처형한 사실과 연결시킨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필자로서는 그가 민생단 사건의 처리과정에 깊이 개입한 사실을 더 중요시하고 싶다.





당시 옌안에는 조선인도 거의 없었지만,

일부 중국공산당원들이 한때 조선인과 같이 활동했을 뿐이지 조선문제에 밝은 전문가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스크바 시절 조선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만주의 혁명운동을 지도했으며,

조선인들이 피해자가 된 민생단 사건의 처리에 참여한 그의 경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일약

마오·왕밍 등과 함께 5명에 지나지 않는 서기처의 성원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사회부 부장이 되었다.



민생단 사건의 처리에서

코민테른 중공대표단은 조선인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그들의 독자성을 인정해주는 등

조선인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새로운 방침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극에 달한 조선인들의 불만을 어루만지기 위한 것이었지

대표단이 조선인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대표단의 주요 성원으로 실질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한 양송(楊松=吳平)이 옌안으로 돌아와 발표한 글을 보면

당시 혁명대오 내에 엄청난 간첩이 침투해 있었다며 민생단원들을 처단한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또 왕밍과 캉성은 민생단 사건을 처리하던 시기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의 지도부가 일제의 스파이라고 의심하여



대규모 스파이 사건을 일으켜

만주의 당조직을 일대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런 경력이 있는 인물이 서간공작을 담당하는 사회부 책임자로 나타난 것은

김산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김산의 죽음이 특히 안타까운 것은

그가 오랜 시련과 고통 끝에



이제는 죽음 이외에는 자신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자신감을 님 웨일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단계에서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33살의 청년 김산이 님을 만나 이야기할 때

그의 숱한 동지들은 거의 다 죽어버린 때였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김산은 그런 죽음이 비극이고 때로는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네가 믿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고 말했다.



불행히도 김산에게는

그런 비극이 아닌 죽음이 차려지지 못했다.



중국에 있는 조선혁명가 가운데 죽을 곳을 받아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던 김산은

그 자신이 마지막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어린 소년 서휘와 함께 님에게 아리랑을 불러줄 때

그 모습이 매우 서글펐다고 님은 적고 있다.



내 인생에 행복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던

젊은이 김산.



그는 아리랑 노래가 조선시대에 사형장에서 불리던 것으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님 웨일스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 행복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던

젊은이 김산,



그는 머나먼 이국의 사형장에서 과연 이 노래라도 부를 수 있었을까?






한홍구ㅣ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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