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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2004-07-10 14:06:37, Hit : 2642, Vote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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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일지>와 <아리랑>에서 나타난 김구와 김산의 독립운동노선의 차이에 대한 연구

<백범일지>와 <아리랑>에서 나타난 김구와 김산의 독립운동노선의 차이에 대한 연구


                                        담당교수: 고동환 교수님
                                        학    과: 전산학과
                                        학    번: 20010441
                                        이    름: 전승재
목차

1. 서론

2. 김구(金九)
        2.1 생애
        2.2 운동활동과 사상적 배경
        2.3 역사적 의의, 한계

3. 김산(金山)
        3.1 생애
        3.2 운동활동과 사상적 배경
        3.3 역사적 의의, 한계

4. 무엇이 그들의 차이를 만들었는가?
        4.1 같은 사건, 다른 반응.
        4.2 김구와 김산의 보편성

5. 결론

1. 서론

이 글의 목적은 제목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독립운동가 김구(金九)와 김산(金山, 본명: 장지락)의 독립운동노선을 알아보고 그 차이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고, 식민지의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상을 운동으로 실천한 지성인이다. 본문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지만 그들이 추구한 운동노선은 너무나 다르다. 김구의 경우 민족주의에 의거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활동노선을 보였고, 김산은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중국 공산당 혁명에 뛰어든다. 이 글에서는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었으며, 나아가 이들이 갈등하였던 양 노선이 민족의 근현대사에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주제가 '독립운동노선'인 만큼 해방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논하지 않겠다.

본론의 첫 부분은 백범 김구에 대한 부분이다. 생애, 활동에 대한 인과와 원동력을 제공했던 그의 사상적 배경, 의의와 한계 순으로 전개시켰다. 사건에 대한 접근은 <백범일지>(우현민 현대어역, 서문당, 1994)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본론의 둘째 부분은 김산에 대한 부분이다. 세부 항목은 김구를 다룬 부분과 같은 순서로 진행하였으며, 김산의 구술을 바탕으로 님 웨일즈가 저술한 <아리랑>(조우화 옮김, 동녘, 1984)을 통하여 사건에 접근하였다.
당시 시대의 상황과 국제 정세, 전후의 역사 등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한국역사>(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1992)를 바탕으로 하였다.
본론 세 번째 부분에서는 김구와 김산을 비교하며, 같은 사건에 대하여 그들이 어떠한 다른 반응을 보였으며, 같은 목표를 위하여 어떻게 다른 수단을 취하였는지를 정리한다. 또 어떠한 사상적 보편성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그들이 반대의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는가를 고찰한다.


2. 김구(金九, 1876~1949)

2.1 생애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호 백범, 본명은 창수, 본관은 안동이다. 본래는 세도가 집안이었으나, 조상 중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몰락하였다. 황해도로 이주하여 상놈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신분상승을 꾀하여 과거를 준비하였으나, 과거시험의 부패를 목격하고 위정자들과 정권에 대한 회의를 갖는다. 이는 나중에 유교와 전근대적 유림 전반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난다.
1893년, 김구가 18세가 되던 해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쫓기는 몸이 된다. 이후 만주를 유랑하다 1895년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한다.
1896년 단발령으로 국내가 어수선해지자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길에 '스지타'라는 변장한 일본 육군중위를 만나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타살한다. 이에 체포되어 인천 감옥에 수감되고 사형을 언도 받지만, 고종의 특사로 감형된다.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 환속하여 1903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한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이때 이름을 '김구'로, 호를 '백범'으로 고쳤으며,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장차 독립하면 정부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고 한다.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에 힘을 쏟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의 직위를 역임한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총재가 된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왕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공원 일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에서 장개석을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 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한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훈련을 지휘하였으나, 일분이 무조건 항복하자 광복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귀국하게 된다. 이때 미 군정이 임시정부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아 임시정부 임원들은 각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한다.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안두희의 총에 맞아 1949년 6월 26일 74세의 나이로 운명한다.


2.2 운동활동과 사상적 배경

(1) 동학사상

어린 시절 김구는 유교적 신분질서를 보고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과거시험의 비리를 눈으로 보게 되면서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동학을 접하게 되는데, 동학과의 처음 만남을 백범일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상격에 낙제하고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맹세한 나에게는 천주를 몸에 모시고 체천행도 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끌렸으며, 또 상놈 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끝났으니 장래의 신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는 참으로 가슴이 뛰고 끓었다.(p. 34)"
하지만 김구는 당시 동학과 농민전쟁이 지향하던 바를 끝까지 이행하지는 못하였다. 해주성 함락에 실패하고 이후 전투에서 후퇴를 거듭하였는데다,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과의 마찰이 생겨 끝내 동학 접주의 이름을 버리고 만 것이다.
동학운동과 농민전쟁은 비록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이들이 주장했던 인본주의와 민족주의는 김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 척사사상에서 개화론으로

김구가 귀향길에서 만난 일본인을 때려죽인 때는 국모 시해와 단발령의 강제 시행으로 민심이 시끄러울 때였다.
"아버지는 허위대가 좋고 성정이 호방하며, 술이 한량 없으셨다. 중략...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시면 참지 못하셨다. <수호전>에 나오는 호걸처럼 친불친을 막론하고 패어주셨다. (p. 22)"
라고 백범일지에 쓰고 있는데, 김구의 이 행동도 특정한 사상이나 테러리즘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격과 동학운동 때부터 기치를 세워온 척사사상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옥중에서 김구는 감리서원들로부터 신서적을 읽으며 위정척사사상의 문제점을 깨닫게 된다. 다음 구절에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한 가닥 양맥이 잔존하고, 세계 각국이 거의 미개한 오랑캐라는 고선생의 말만 믿었었다. 그러나 <태서신사> 한 책만 보아도 눈이 깊고 코가 높은 그들이지만 원숭이와 다를 바 없는 오랑캐가 아니라, 도리어 건국치민의 좋은 법도가 사람답기만 하지 않은가. 또한 아관박대로 선풍도골을 좇는 탐관오리들이 도리어 오랑캐의 이름에 걸맞다는 각성이 들게 되었다.(p. 99)"

(3) 교육계몽운동

기독교에 입교한 후 김구는 교사로 근무하며 신교육 사업에 열성을 쏟는다. 이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김구는 "의병장들이 군사지식이 없이, 다만 충천하는 의분심만 가지고 뒤이어 일어났지만 도처에서 실패하기만 하는 것이었다. (p. 167)"라고 평하고 있다. 신교육에 임하였던 그의 태도는 그가 양산학교에 있던 시절 이명근 이라는 독립운동가가 김구를 찾아와 운동의 동지로 청한데 대한 대답에서 잘 나타나 있다.
"나는 간곡히 만류했다. 장래 대규모 전쟁을 하려면 많은 인재를 양성하지 않고는 성공을 기할 수 없고, 일시적 격발한 것으로는 5일은커녕 3일도 버티기 어렵다. 분기를 인내하고 많은 청년을 북쪽 지대로 인도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함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설득했다.(p 188)"
당장의 무력투쟁으로는 일제에 큰 타격을 주기 어렵고,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나라를 구할 현실적 방법이라 생각한 것이다.

(4)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한 김구가 모든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시하였던 것은 '민족'과 '명분'이었다.
모든 운동에서 '민족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노선을 내세웠다. 따라서 중국 혁명을 이용하여 일제를 응징하려는 공산주의 세력을 싫어했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은 '민족'보다는 '계급'을 우선시하여 통일전선의 구축을 통한 항일운동보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을 중요시하였고, 민족운동가들과의 노선 조율보다는 코민테른에서 내려진 지령에 충실하였으므로 '민족이 주체'라는 원칙에도 위배된다. 이에 대해 김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략... 독립운동을 공산운동화하자고 절규해댔다. 그러다가 레닌이 공산당 사람들에게 반론하기를,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는 말에 따라,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조롱하며 비웃던 공산당원들이 졸지에 변해 독립운동, 민족운동을 공산당 당시로 주창했다. (p. 274)"
이동휘가 총리로 있을 때 김구에게 공산혁명에 협력해달라고 설득하자 김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한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 3자의 지도,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하고, 곧 의존성 운동이니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고, 제는 선생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p. 272)"
'명분'에 있어서도 유교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명분'과는 다르다. 유교에서의 명분은 군주에 대한 충(忠)에서 비롯되어 그 주체가 국가의 지배층이었다면, 김구의 운동 '명분'은 정부와 국가의 단계를 넘어 민족 구성원 본인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들이 임시정부를 이탈하고, 이에 일제의 대량 검거까지 겹쳐 임시정부의 운영이 어려웠던 시기에 김구가 추진했던 가장 알려진 활동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루어낸 의거활동일 것이다. 테러리즘의 모습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존재와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임을 인정받는,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해외교포들과 타 운동단체,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는 광복군 조직자금으로 이용되었다.


2.3 역사적 의의, 한계

김구의 민족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민족이 만사의 으뜸이고, 모든 행위는 민족이 주체가 되어 일어나야 한다. 이는 김구가 동학, 위정척사사상, 기독교, 계몽운동, 결사운동 등을 추진하며 얻은 결론이고, '민족'을 '국민'으로 대체하면 현대의 민주주의 기본 원칙과도 유사하다.
둘째, 자주독립론이다. 민족의 해방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인 방법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이나 중국의 도움을 얻어 일제를 몰아내려는 세력을 김구는 비판하였다.
셋째, 정치적인 자유이다. 오직 헌법만이 국민의 행위를 제한할 수 있고, 이 조차도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독재와 공산주의를 부정한다.

일제강점기의 해외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노선에는 크게 외교노선, 교육계몽 노선, 민중직접혁명 노선, 공산주의 노선이 있다. 이들의 특징을 간단히 보자면, 외교노선은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중국, 미국, 영국 등 열강과의 외교를 이용하여 그들의 압력으로 일제를 몰아내자는 노선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의 신탁통치를 미국에 부탁하는 청원서를 낸 것이 반민족적이라는 질타를 받고 결국은 탄핵된다. 교육계몽 노선은 안창호 등이 중심이 되어 교육을 통한 민족의 실력을 양성으로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민중직접혁명 노선은 신채호가 발의한 것인데, 외교노선과 교육계몽 노선 등 비투쟁적인 노선을 비판하고 민중의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산주의 노선에 대해서는 김산을 다루면서 자세한 분석이 될 것이다.

(중략)
5. 결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김구와 김산은 각각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다른 이념으로 '민족해방'을 이루고자 하였다.
왜 그들이 이렇게 다른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를 요약하면, 일단 그들의 성장 배경이 달랐고,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주요 사건들을 다르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구는 모든 운동이 '민족'을 대상으로 '민족'이 주체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 보는 '명분'과 '정통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둔다. 반면 김산은 이 같은 개념이 희박하여 항일 투쟁의 주체가 꼭 '한민족' 혼자일 필요는 없으며, '민중 혁명'이라는 공통분모를 두어 '중국 공산당'이라는 거대한 집단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도 운동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상대의 노선과 함께 일제에 대항할 필요성을 느껴 통일전선 구축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각자의 노선이 지닌 한계에 부딪치고, 민족운동가들간의 노선이 조율되기 전에 전쟁이 끝남으로써 우리 민족은 타의에 의한 해방을 맞고, 민주주의/공산주의 이념대립을 해결하지 못한 채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이 되었다. 김구, 김산 같은 인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 운동단체가 단일노선을 채택하여 역량을 모으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끝으로 느낀 점이 있다. 그동안 중, 고등학교에서 배워온 항일 독립운동사가 왜곡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반공교육으로 인하여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식민사관에서 덜 벗어난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식민지와 분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해주신 고동환 교수님께 감사 드린다.

참고문헌

김구, 우현민 현대어역, <백범일지>, 서문당. 1994.
님 웨일즈, 김산, 조우화 옮김, <아리랑>, 동녘. 1984.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1992.

두산세계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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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그리고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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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아리랑의 최후를 아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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