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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2004-07-10 13:49:33, Hit : 1242, Vote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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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장지학 [ 張志鶴 , 1905.3.10~1938 ]


장지학 [ 張志鶴 , 1905.3.10~1938 ]  

지역 > 아시아 > 한국 > 한국일반
인물 > 문학 > 한국문학
역사와 지리 > 역사 > 한국사 > 현대


  요약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시인·사상가.

별칭 : 김산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정치·사상·문학
출생지 : 평북 용천
주요작품 : 장시 《한 해 동지를 조문하여》 《동지들이여 싸우자》, 소설 《백의동포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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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본명인 장지학보다 별칭인 김산으로 더 유명하며, 김일성(金日成)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장지락으로 등장한다. 1905년(고종 42) 3월 10일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태어나 11세 때인 1916년 가출, 1919년부터 이듬해까지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같은 해 쑨원[孫文]이 세운 황푸군관학교[黃軍官學校]와 중산대학[中山大學]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공산당에 입당한 뒤, 이듬해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였다. 1925년 중국대혁명에 참가한 뒤, 다음해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하였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같은 해 11월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났다. 이후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및 소학교 교사로 생활하다가 1933년 4월 중국 경찰에 붙잡혀 1934년 1월 탈출하였다. 이어 공산당 북부지구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하였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화학·수학·일본어·한국어를 강의하는 한편, 같은 해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미국의 신문기자 스노(Edgar Parks Snow)의 부인 웨일스(Nym Wales)를 만나 3개월 동안 20여 회에 걸친 구술을 통해 그의 혁명적 생애를 다룬 《아리랑 Song of Ariran》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이듬해 캉성[康生]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1941년 뉴욕에서 《아리랑》이 출판되었고, 이후 1946년 한글로 초역된 이래 일본어로 11판까지 번역·출간되었으며, 1987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어로 완역되었다. 웨일스는 그를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으로 격찬하였고, 1984년 1월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소설 작품으로 《백의동포의 영상》이 있고, 《한 해 동지를 조문하여》 《동지들이여 싸우자》 등의 장시와 여러 편의 칼럼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2002년 12월 8일 《아리랑》 초판본이 처음 공개되었고, 그를 기념하기 위한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장지락 , 張志樂]

요약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별칭 : 가명 김산(金山) ·손명구, 필명 염광(炎光) ·장북성
활동분야 : 독립운동, 혁명운동
출생지 : 평북 용천
주요저서 : 《기묘한 무기》(1930), 《백의민족의 영상》(1938)



본문

평북 용천 출생. 가명 김산(金山) ·손명구 ·유청하 ·유한평 ·이철암 ·한국류. 필명 염광(炎光) ·장북성. 1919년 3 ·1운동 후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일본과 만주를 거쳐 1920년에 상하이[上海]로 갔다.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편집을 이광수가 맡고 있었는데, 그를 도와 교정을 보면서 식자공으로 일하였다. 1921년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이 시기에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으며, 베이징에서 김성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잡지인 월간 《혁명》을 발간하였다. 1924년에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북경지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와도 교류하여 1925년에는 당시 중국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였던 광저우[廣州]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 분파주의를 청산하고 통일된 운동을 주도하기 위하여 김원봉 ·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또한 각 파벌의 주도권 경쟁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한국공산주의자’라는 비밀그룹을 결성하였으며,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족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27년에는 중국인들과 함께 광둥[廣東]코뮌 건설에 참여하였으나 3일 만에 중국국민당의 공격을 받아 해륙풍소비에트로 철수하였다.

1929년 해륙풍소비에트마저 국민당 측에 점령되자 그곳에서 탈출하였다. 그 후 조선인의 중국공산당 입당을 주도하다가 1930년 11월과 1933년 4월 2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2차례 모두 곧 석방되자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중국공산당에 다시 가입하지 못하였다. 1936년 상하이에서 김성숙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후 옌안[延安]의 군정대학에서 가르쳤으나, 1938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반혁명죄와 간첩죄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1983년 복권되었다.













김산의 일본관
3.1운동 당시 김산의 역사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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