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페이지 1
 


  기미양(2005-08-13 10:34:34, Hit : 1136, Vote : 60
 김산관련 기사

2005년 8월 12일 (금) 18:08  한겨레21

[한겨레] 독립운동가로 제대로 대접받게 된 김산·한위건 등 47인의 소설같은 삶 “독립 위해 싸웠으나 억울하게 잊혀진 사람들 계속 발굴해야 한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지난해 2월로 기억된다.

중국 출장길에 베이징에서 좌파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의 삶을 쫓는 데 평생을 바친 최용수(61)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 댁을 방문하게 됐다.

최 교수의 전공은 철학(유교)이지만, 중국에 남겨진 조선 항일투사들의 기록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다 이들의 삶을 뒤쫓게 됐다.

아리랑>이 던진 충격을 아십니까 그는 “김산(본명 장지락·1905~38)을 포함한 많은 조선 사람들이 중국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지만, 중국은 이들을 외국인으로 치부해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남한은 지난 60년 동안 임시정부와 광복군 등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만 매몰돼 있었고,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에만 초점을 맞췄다.

8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고 조선 독립을 위해 노심초사하다, 드넓은 중국 대륙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고귀한 영혼들의 삶과 죽음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리랑>의 등장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좌파 독립운동에 ‘개안’하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아리랑>을 본 사학도들이 김산이 실존 인물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며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모두 좌파 독립운동에 대해 무지했다”고 말했다.

천안문>을 지은 조너선 스펜스는 용기에 대해 “거의 가망이 없을 때조차도 확고한 희망을 견지하며 허물어져가는 살벌한 세계에서 순전히 정력과 명분만으로 생존의 과녁에 돌진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김산이나 한위건보다 이 말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삶의 궤적을 조용히 응시하노라면, 중국 대륙이라는 커다란 바다 속에 빠져 형체조차 알 수 없게 녹아버린 소금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역사의 희생자였고, 그들이 꿈꿔온 해방 조국은 그들을 기억에서 지웠다.

최 교수는 “언제쯤 김산이나 리철부(본명 한위건·1896~1937) 같은 사람의 공적이 인정받을 수 있겠냐”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변한다.

지난 8월3일 국가보훈처는 1926년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1893~1986), 상하이에서 6·10 만세운동을 지원하고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김태연(이명 김단야·1900∼38),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사법부장과 사료편찬위원을 지내고 의열단 활동에 깊숙이 개입한 김한(1887∼1938), 조선학생혁명당을 만들어 활동한 정헌태(1902∼40), 조선혁명군 제1연대장을 역임한 최윤구(1903∼38), 한위건, 김산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지난 3월 여운형, 조동호 선생 등을 서훈할 때부터,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이 아니면 공산주의자라도 적극 서훈하기로 방침을 정해 이를 따른 것”이라고 변화된 모습을 설명했다.

이 중에서 관심을 모으는 것은 단연 김산과 한위건이다.

한위건은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에 김산과 갈등을 빚는 ‘한모’로 등장한다.

한위건은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 등 5등급으로 나뉘는 서훈 등급 가운데 3등급인 독립장으로, 4등급인 애국장을 받은 김산보다 높은 훈격을 받았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한위건은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이기도 했지만, 학생 대표로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여러 공적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1 독립선언서 낭독과 한위건 한위건은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애국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졌을 때 그는 파고다공원 앞에 모인 군중 앞에 선 학생 대표였다.

민족의 지도자로 길이길이 추앙받는 민족대표 33인은 그때 태화관에서 청요리를 시켜놓고 좌불안석하고 있다가, 총독부가 모시러 온 차를 타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태화관과 파고다공원의 거리는 겨우 150m. 학생들은 오지 않는 민족 지도자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다, 제 스스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이끌었다.

이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 대표가 한위건이라는 설이 있는데 명확히 증명되진 않는다.

이후 한위건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한 뒤,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공산당 지도부로 활동했다.

그는 1928년 봄 당이 일본 경찰에 의해 소탕될 때 탈출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고, 거기서 김산과 운명적인 첫 조우를 한다.

김산은 한위건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중국 베이징으로 옮겨 베이징시당의 조직부 일을 보고 있을 때 그의 입당 신청을 처리하지 않았다.

김산이 1930년 11월20일 광저우 봉기 3주년 기념행사 준비회의에 참가하러 가는 길에 베이징에서 국민당 경찰에 체포된 뒤, 둘의 운명이 뒤바뀐다.

김산은 중국 경찰에는 “조선 신문기자로 중국 국적을 가지지 않았다”며 공산당과의 관계를 부인했고, 일본에서는 “마르크스 사상을 연구했을 뿐”이라고 대답해 양국 경찰의 추궁을 피해 무사히 석방됐다.

그 와중에 한위건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김산은 “쉽게 중국과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점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당적이 박탈됐다.

그 무렵 한위건이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김산은 “그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고 비수를 품고 그의 집에 숨어들었다.

이 광경을 김산은 님 웨일스에게 “나는 비수를 꺼내 식탁 위에 조용히 올려놓고 ‘5분 안에 둘 중 하나가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담담하게 회고했다.

김산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한위건의 모습을 보고 칼을 식탁 위에 놓은 채 방을 빠져나왔다.

두 혁명 투사는 1년 간격을 두고 한 사람은 장질부사(한위건)로, 또 한 사람은 캉성의 지령에 따라 비밀 사형(김산)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일제 밀정’ 누명 쓰고 처형된 김한 이 밖에 독립장 서훈이 결정된 김한의 활동도 관심을 모은다.

김한은 초기 임시정부의 서무국장으로 재직하다가, 1920년 2월께 귀국해 서울청년회, 무산자동지회 등의 결성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한국 사람들을 탄압하고 무장해제시키던 소련 경찰에 의해 일제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1938년 처형됐다.

동아일보> 1925년 4월1일치 2면을 보면, 김한이 의열단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와중에 경성 공덕리 224번지 그의 집에 남겨진 가족 4명이 갖은 고생을 다하는 광경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아내 배씨 부인(당시 38살)은 고무공장에 취업해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고, 어머니 이씨(당시 나이 68살)는 조밥을 지어 두 손녀 딸인 ‘원뎡’과 ‘예뎡’을 먹였다.

그때 ‘예뎡’으로 불렸던 김한의 딸 김예정(87·경기 고양시 일산구)씨는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서훈이 두번씩이나 거부된 뒤 사실상 서훈을 포기하고 있었다”며 “이국 땅에서 억울하게 숨을 거둔 아버지의 죽음을 보상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서중석 교수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쓴 모든 사람들을 발굴해 우리 독립운동사의 지평을 넓혀야 할 것”이라며 “아직 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님 웨일즈 문화훈장 받다
출판및 김산 서훈 기념 아들 고영광씨 초청 간담회-보도자료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zero

 아리랑나라
서울시 종로구 권농동 127-4 유성빌딩 4f

tell:02-763(762)-5014 010-4764-8844

Email : kibad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