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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2005-04-10 22:16:47, Hit : 1357, Vote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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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혁명가' 김산을 아시나요?


'잊혀진 혁명가' 김산을 아시나요?  
[오마이뉴스 손병관 기자]  

▲ 1937년 중국 옌안 시절의 김산.  


‘잊혀진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이 오는 8·15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가 28일 김산 등 사회주의계열 운동 참여 등의 이유로 포상이 보류된 2만6천여 명에 대한 재심사를 추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평북 용천 출생으로 16세에 3·1운동의 실패를 지켜본 뒤 집을 떠나 중국의 상하이, 베이징, 광둥, 옌안 등을 전전하다 스파이로 몰려 죽음을 당한 그의 인생행로는 일제하 고난의 민족사를 함축한다.

1937년 옌안에서 그를 만난 뒤 훗날 전기까지 썼던 님 웨일스는 그를 “민족주의자였으나 국제주의자였고, 무정부주의자였다가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회상했다.

그가 1920년 중국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상하이. 그곳에서 춘원 이광수가 경영하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교정·식자공으로 일했던 그는 안창호, 이동휘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듬해 의학공부를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접한 뒤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매혹됐다.

1923년 상하이로 돌아와 공산청년동맹 회원에 가입한 그는 베이징에서 김성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발행하는 등 두 도시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1924년 <혁명> 창간동지들과 함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베이징 지부를 설립했고, 중국공산당 창당 멤버였던 리다자오와 교분을 쌓았다.

1925년 가을 중국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은 광조우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이듬해 김원봉·김성숙과 함께 조선혁명청년연맹 결성을 주도했다. 이 시기 그는 공산주의자로서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족독립당을 조직하는 등 유연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 동지들과 광둥 봉기를 일으킨 뒤 코뮌을 건설하기도 했던 그는 3일 만에 중국국민당의 반격으로 해륙풍 소비에트로 철수했다. 2년 뒤 해륙풍 소비에트마저 국민당에 점령당하자 베이징으로 돌아와 지린·안둥 지역 조선인의 중국공산당 입당사업을 전개했다.

1930년과 33년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베이징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김산은 일경의 모진 고문에도 혐의를 끝끝내 부인해 풀려났지만, 동지들은 그를 일본 스파이로 오인하기 시작했다.

그가 1936년 상하이에서 김성숙·박근성 등과 함께 결성한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정치적으로는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 1919년에 결성된 각국 공산당 연합체)의 노선을 지향했지만,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민족해방 이후의 과제로 넘겼기 때문이다.

김산은 1937년 옌안의 군정대학에서 한국어와 일본어, 물리학, 화학 등을 가르쳤지만, 그를 일본 스파이로 의심한 옌안지역 공산당 정보 총책임자 캉성(康生)에 의해 이듬해 1월 처형됐다.

중국 공산당이 1984년 “그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라며 김산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김산을 무정부주의자로 폄하했던 북한도 1992년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서훈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아리랑> : 80년대 청년들의 가슴에 혁명 심어준 '대학생 필독서'  


  
▲1941년 발간된 영어판 <아리랑>의 초간본 표지  

님 웨일스(본명 : 헬렌 포스터 스노, 1907~97)가 1941년 <아리랑 (Song of Arirang)>을 펴내지 않았다면 김산도 지금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1937년 옌안에서 김산을 20여차례 인터뷰한 웨일스가 김산을 “1930년대 이후 조선인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인식, 행동 양식에 대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한 것을 보면 그가 김산의 삶에서 느낀 절절한 감동을 짐작할 만하다.

<아리랑>의 존재는 1959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였던 리영희 한양대 교수가 일본의 한 서점에서 일본어판을 발견하면서 국내에 처음 알려졌다.

그 후 오랫동안 대학생과 지식인사이에 영어판과 일본어판이 돌아다녔지만 오랜 군부독재 치하에서 좌익혁명가의 전기를 번역해보려는 출판사는 없었다.

1983년 말 노동운동가였던 친구 송영인의 번역원고를 읽은 이건복 동녘출판사 사장이 결국 ‘사고’를 쳤고, 전두환 정권의 서슬퍼런 탄압 속에도 한국어판 <아리랑>은 80년대 변혁을 꿈꾼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매김됐다.  







김산(본명 장지락)을 올해 8.15에 독립 유공자로 서훈을 신청할 예정
[사설] 뜻깊은 ‘아리랑 김산’의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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