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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아리랑' 찾아 일시귀국 이정면 박사" 2005.06.15



"아리랑 박사 돼 영문책 내겠다"

(서울=연합뉴스) 이종호 기자 = 아무도 몰랐던 미국 중서부지역 한인 노동자들의 역사를 발굴하고 교민회를 조직하는 등 이국 땅에서 온몸으로 '동포 사랑'을 실천해온 한 원로 학자가 이번에는 영원한 겨레의 노래 '아리랑'을 위해 서울을 찾았다.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 이정면(李廷冕.80) 박사.

지난달 25일 입국한 이 박사는 당초 이달 23일까지 머물기로 했던 계획을 수정, 체류기간을 연장해가며 '아리랑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정선아리랑'의 정선과 '밀양아리랑'의 밀양은 물론, 지난 10일에는 경북 영천에서 열린 제1회 영천아리랑 축제(6일자 연합뉴스 참조)에도 다녀왔다. 이번 주말엔 '진도아리랑'의 고향인 진도행이 예정돼 있다. 국립도서관에도 수시로 출입하고 있다.

"영천아리랑은 1935년 조선일보에 가사 두 수(首)가 소개돼 있지만 이후 60년대에 작성된 민속 관련 조사보고서에는 아예 언급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40년대에 옌볜(延邊)으로 집단이주하는 과정에서 이 노래를 아는 이들이 대부분 영천을 떠났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이 영천아리랑이 북한에선 여전히 살아 있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만찬장에서 연주된 것은 물론이고 환영에 나선 북한 주민들도 연도에서 남측 인사들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었던 것. 김일성이 '혁명동지'라고 불렀을 만큼 항일운동 시기에 자주 불렸던 노래다.

"양화진에 있는 헐버트(1863-1949)의 묘지에 갔을 땐 정말 뭉클했습니다. 우리 음악 가운데 최초로(1896년) 서양식 오선지 악보에 옮겨진 음악이 아리랑이라는 사실도 지극히 상징적이구요."

이 박사의 '아리랑 서울행'에는 그의 꼼꼼한 '확인정신'도 작용했다. 원래 유타주 동포신문에 아리랑에 대한 글을 3회 연재하기로 하고 글을 다 써놓았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 미국 음악학자가 쓴 아리랑에 관한 글을 읽었다.

"부끄럽더군요. 외국인도 이 정도 썼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서 평소의 상식과 자료만 가지고 썼구나 싶었죠. 그래서 연재를 미룬 채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노래' 등 구할 수 있는 관련 자료를 모두 읽은 뒤 서울로 온 겁니다."

운도 좋았다. 서울에서 만난 옛 동료와 제자들이 최고의 아리랑 전문가인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김 이사는 즉석에서 이 박사의 개인교사 겸 길잡이가 되어 함께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전남 광주 출신인 이 박사는 서울대 사대 지리교육과를 마치고 1960년 미시간대에 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경희대 교수와 한국종합개발기술공사 임원 등으로 일했다. 전공은 토지이용계획과 인구론.

1967년 말레이시아의 말레이대학 초빙교수, 70년 캘리포니아대를 거쳐 72년 유타대에 정착했다. 학교에서는 80세까지 정교수직을 계속 맡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제발 좀 쉬라"는 부인의 압력에 굴복, 재작년에 그만두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유타에 오자마자 교민들(현재는 약 5천 명)이 교민회를 구성해달라고 부탁해왔다. 필요한 서류나 행정절차만 대신해주면 되겠지 했는데, 이번엔 회장직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사이 유타주-경기도 자매결연도 성사됐고, 교민신문 '유타 코리아 타임스'(반월간)도 나오고 있다. 이 박사는 여기에 칼럼을 정기 기고하고 있다.

본격적인 아리랑 연구를 위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일찍부터 외국서 살아온 그로서는 아리랑에 대한 상념이 사뭇 남다르다.

"말레이 대학에 있을 때 학생들과 함께 현장실습을 나가려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어요. 그래서 버스 안에서 가르친 게 아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몇 년 후 말레이시아를 떠나던 날 학생들이 환송연에서 불러준 마지막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었어요. 달빛 푸르던 그 캠퍼스 옥상의 광경을 저는 평생 못잊을 겁니다."

"2002년 학회 참석차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나운규의 '아리랑' 제작과정에 대한 일본 당국자의 기록을 읽게 됐습니다. 총독부의 감시를 받아가면서도 그가 어떻게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몸부림쳤는가를 생생히 알 수 있었죠. 후손으로서 감사하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학자로서의 전공과는 별도로, 그가 근대화의 혼란 속에 파묻힌 민족사를 캐내고 이역에 둥지를 튼 우리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투신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유타에서도 교민회 일만이 아니라 중서부(미드웨스트)로 팔려왔던 광산 노동자들의 존재를 확인해 알린 이도 바로 이 박사다.

"공식적으로는 갤릭호가 하와이에 도착한 1903년이 한인들의 미주 이민 원년이지만 실제로는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중서부 구리광산 노동자들도 그 한 부분이지요."

광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들 가운데 묘비의 이름으로 보아 한국인임이 분명한 경우를 몇 차례 목도한 이 박사는 2000년대 초반 광산 자료실에서 "40개국 노동자가 와서 일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 안에 'Korea'가 포함된 것을 확인했다. 다만 그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그곳까지 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여름방학 내내 유타대 도서관을 뒤져 당시 한국인 광산노동자가 400명이 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그러나 그의 '확인정신'은 '400여'라는 불완전한 수치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듬해 여름방학을 또다시 송두리째 바쳐 416명이라는 구체적 숫자를 잡아냈다.

이중 경기도 포천 출신 유공우의 경우는 고향에 네 살짜리 아들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확인, 포천시에 확인을 부탁했으나 실패했다. 이 박사는 때마침 이민 100년사를 취재하던 KBS 팀에게 다시 부탁해 결국 후손들을 찾게 했다. 유공우의 후손들은 이국 땅 초라한 할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이 박사의 손을 잡고 한없이 울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로키산맥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2002) 등 몇 권의 단행본으로 정리돼 있다.

인터뷰에 동석한 김연갑 이사는 그에게 "아리랑에 대한 영어책을 반드시 쓰시라"고 줄기차게 강권했고, 이 박사는 "김 선생이 좀더 도와준다면 영어로 쓰는 일은 내가 맡겠다"고 다짐했다.

김 이사는 "아리랑에 관심이 있다면서 제 사무실을 찾아온 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처음부터 아리랑을 위해 오신 분은 이 박사가 처음"이라며 "가사가 6천 수나 될 정도로 다양하면서도 단일 명칭으로 불리는 노래, 저항과 기쁨의 노래이자 해원상생의 노래, 남한/북한은 물론 세계 어디서나 한민족이라면 모두가 부를 줄 아는 아리랑을 민족의 에너지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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