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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수(2011-01-16 20:13:27, Hit : 570, Vote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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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례21] "아리랑의 변신, 장단에서 선율로" 2003.09.17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교향곡으로 풀어놓은 재일동포 2세 작곡가 김학권씨

인심은 구구해도 노래는 유구하다.

남한의 인심을 뒤흔들어 놓았던 북의 응원단은 갔지만 함께 부르던 노래는 여전하다. 승리를 기원하는 경기장에서도, 헤어지기 아쉬워 눈물 흘릴 때도, 그래서 다시 만나자며 손가락 걸 때도 불리는 노래, 아리랑. 현해탄 너머 저 멀리 일본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아리랑을 부르던 재일동포 2세 작곡가 김학권(55)씨가 한민족아리랑연합회(상임이사 김연갑)의 초청으로 최근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1991년 북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김학권씨는 북한과 총련 동포들 사이에선 잘 알려져 있지만 남한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편집자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작곡노트를 펴들었다. 연필로 악상을 기록한 노트에는 가지런한 필체로 <교향적 서정시곡>이라 적혀 있었다. 한민족아리랑연합회의 부탁에 따라 아리랑을 주제로 작곡한 관현악곡이다. 2003년 1월5일 시작해 6월에 마무리지었으니 꼬박 6개월 동안 정성을 쏟은 작품이다.

민족의 고통을 껴안은 <교향적 서정시곡>

“아리랑은 우리 아버지의 노래입니다.” 그는 아리랑이 스스로의 삶에 무척 구체적인 영향을 끼친 노래라고 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14살이던 1937년 형을 찾아 무작정 일본행 배를 탔다. 일본어 한자 모르던 소년은 시모노세키항부터 도쿄에 이르기까지 꼬박 이틀이 걸리는 고단한 열차 여행 동안 혹시 내리는 곳을 놓칠까봐 기차가 역에 멈춰설 때마다 역 이름을 죄다 적은 종이를 한장씩 떼어가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마침내 소년은 지바현에 사는 형을 만났고, 부두 노동자부터 시작해 안 해본 일 없이 스무 군데 넘게 일터를 옮겨다닌 끝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겪었던 고생이야 이루 옮길 수 없겠으나, 김씨의 아버지가 그 와중에도 유달리 행복해 보였던 순간은 친구들과 술에 취해 아리랑을 부를 때였다.

“그릇을 두드리고 젓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며 아리랑을 불러댔죠. 그건 슬픔과 기쁨과 그리움이 뒤섞인 풍경이었습니다.” 김씨는 아버지의 아리랑이 자신이 지은 아리랑 교향곡의 맨 밑바닥 정조를 이루었노라고 말한다. 모두 4장으로 구성된 <교향적 서정시곡>은 식민지 아픔 속에서 조국 땅을 떠난 민족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곡이다. 오랜 유랑의 한을 담은 ‘유구’, 부모형제와 떨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을 노래한 ‘현해탄’, 끝내 조국의 밝은 날을 보지 못하고 숨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진혼’, 이 모든 설움을 딛고 동서남북 동포들이 함께 춤추며 넘어가자는 ‘아리랑 고개’로 이뤄져 있다. 아득한 피리 소리와 장구 장단으로 시작해 서양 악기들의 합주에 이르렀다가 다시 흥으로 한으로 풀어지는 아리랑 장단으로 마무리한다. “얼굴 모르는 할아버지 찾아/ 현해탄 건너서 이국의 고개/ 할머니 넘으신 눈물의 고개/ 아리랑 고개는 어디에 있나(…)/ 경상도에 있다고/ 전라도에 있다고/ 일본 하가따에도 있다고/ 아니~ 유바리에도 있다고/ 할아버지 할머니 넘으신 고개/ 우리 겨레 모두가 넘어온 고개/ 아리랑 고개는 지도엔 없소/ 아리랑 고개는 지도에선 못 찾아.”

한점 떨어진 혈육을 찾아 낯선 이국을 찾아왔던 김씨 아버지가 탁주 한 사발에 목놓아 부르던 아리랑은, 오늘날 우리 민족의 씨앗이 떨궈진 자리마다 피어난 노래가 되었다. 신나라레코드사와 한민족아리랑연합회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아리랑은 먹고살기 위해서든, 독립운동 때문이든 한반도를 떠났어도 조선인이면 모두 알고 부르던 가락이었다. 바꿔 말하면 아리랑이 불리는 곳에서는 반드시 조선인도 있었던 것이다.

1925년 독일민족민소학회가 1차 세계대전 때 사로잡힌 각국 전쟁포로들을 연구한 자료를 모아 발행한 <이방민족의 민속연구>에는 러시아 백군에 용병으로 참전했다 포로가 된 조선인 ‘안 슈테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연이은 한반도의 기근으로 러시아령 중앙아시아까지 흘러들어갔던 그는 러시아 백군의 총알받이 신세까지 된다. 조선 유민 ‘안 슈테판’은 신산한 인생 역정사를 노래 한줄에 담았는데 그것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민속연구>에는 이 노래를 <하리랑> <아리랑가> <아리랑 쓰리랑>으로 옮겨 실어놓았다.

서양 악기로 우리 가락을 맛나게 연주

그런 이유로 아리랑은 조선인과 타민족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한 중공군은 자신의 일지인 ‘항미원조수첩’에 <조선무곡>이라는 이름으로 아리랑 가락을 적어놓았다. “이 노래를 부를 줄 알면 조선인임에 틀림없다.” 얼굴만 보고선 남북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던 그 중공군은 아리랑 곁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도 적어놓았다. “아리랑은 남북 모두가 부른다. 하지만 김일성 장군의 노래는 북한 사람들만 알기 때문에 이로써 분간할 수 있다.”

한민족에게는 운명처럼 씌워져 있는 노래, 아리랑을 교향곡으로 풀어놓음에 있어 김학권씨는 서양 악기도 마치 전통 악기처럼 활용한다. 가령 그에게 피아노는 음 하나하나를 가지런히 고루고루 눌러야 하는 서양 악기가 아니라, 가야금처럼 퉁기고 판소리처럼 꺾고 대금처럼 휘들어지는 우리 음의 표현 도구다.

“일본에서 평양을 오갈 때 풍랑 치는 동해바다를 삼박자의 출렁임으로 느끼곤 합니다. 하나, 둘, 셋 하면서 그 파도의 리듬에 몸을 싣다보면 어느새 내 안에서 가야금 산조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음악도 조국도 유년시절의 김씨에게는 멀고 멀었다. 소학교 6학년 때까지 일본인 학교를 다녔던 그는 주위 친구들의 따돌림과 외면 속에 수줍고 소극적인 소년으로 자라났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나를 근심하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부르셨죠. 도쿄로 나가 조선인학교를 다니라고.”

조선인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그때 처음으로 ‘이순신’도 배웠고 ‘거북선’도 깨쳤다. 민족적 자긍심이 그의 가슴에 흘러들기 시작하면서 음악도 만났다. 취주 밴드부는 음악으로 이르는 소박한 실마리가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가 되어 모교로 다시 돌아온 그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지어주는 데 재미를 붙였다. “음악을 제대로 하고 싶어 조선인에게 호의적인 작곡가 한명을 무작정 찾아갔죠. 정식으로 음대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레슨만으로 작곡을 배웠어요.”

남북이 함께 아리랑 교향곡 연주하길…

74년 북한을 방문한 김씨는 난생처음 ‘제대로 된 음악가들’로부터 “재밌는 거 쓴다”는 격려를 받았다. 형식의 완성도보다 서양악기로 우리 음악의 정서를 표현하고자 하는 발상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혼자 한발한발 음악적 정진을 거듭한 끝에 김씨는 가곡부터 교향악까지 자신의 스타일을 이루게 되었다.

“앞으로 이 아리랑 교향곡을 남한•북한에서 함께 연주하길 소망합니다.” 그는 빼곡히 음표가 적힌 노트를 접으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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