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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편

외로운 뗏목길에 아리랑도 흐른다
「인제 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택지리>에도 없는 말이고 보면 이 말은 근래에 생긴 말임에 틀림없 다. 월남전을 경험했던 소위 '와리바시 군번'의 선배들이 만든 말이라고도 하는데 강원도 인제와 원통리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본다.

이곳이 군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최근 심메마니들의 생활 풍습이 소개되면서 부터이 고 또 하나는 민속경연대회에 입상하여 TV화면을 자주 차지했던「인제 뗏목아리랑」때문이었다.
둘다 이곳이 험 준한 산악지방임을 나타내주는 것들인데 하나는 지금도 풍습이 전해지고 있고, 하나는 이미 그 풍물이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벌목이 금지됐지만,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엔 숱한 벌목꾼이 모여들어 盛市를 이루었고, 合江을 中心으로 뗏목과 뗏꾼의 애환이 점철된 곳이기도 했다.


인제 合江에서 출발한 뗏목 대열은 마치 사막의 캐러반처럼 외롭기만 하다.

앞사공이 목청을 열었다.

「창랑에 뗏목을 띄어 놓으니
아리랑 타령이 처량도 하네」
노래는 곧 그레 젓는 소리에 묻히고 뒷사공은 조는 듯 말이 없다. 강원도 지방의 뗏목 역사는 짐작컨대 先史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터이나, 木材수요가 왕성했던 李朝 初期를 그 본격적 시원(始源)으로 잡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인제 지역의 森林資源은 과거부터 有名하여 목재, 화목으로 사용되었고 그 주요 통로는 소양강이었다.

엄청난 덩치의 나무를 운반하는데는 물보다 더 유리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뗏목을 목적지까지 사고 없이 운송하기 위해「뗏군」이 필요했다.

合江에서 떼를 묶어 제일 멀리는 서울까지, 가깝게는 春川까지 운반하는 일이 이들의 임무였던 것이다. (때로는 뗏목 위에 땔감이나 옹기를 얹어 운반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웃짐치기라 했다.)

서울까지 가는 뗏군은「아래뗏사공」, 春川까지 가면「골안뗏사공」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뗏길이 막혀 버린 청평댐 준공(1943) 이후로 그 자취를 감췄다.


뗏군이 부른 아리랑은 거의가「강원도아리랑」調를 띤 것이었다.

인제에서 춘천까지 하루, 춘천에서 서울까진 7∼15일 정도 걸리는 뗏길.

春川까지의 뗏길은 길어야 하루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여기엔「큰포와리」(일명 호랑이여울)에서의 사투가 도사리고 있어 앞 뒷사공은 바짝 긴장하게 된다.

이 곳을 지나려면 집채만한 물더미가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자칫 잘못하면 강변 石壁에 부딪쳐 난파당하는 일이 비일 비재했기 때문에 노련한 뗏꾼이라도 이곳은 항상 두려움의 길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떼가 출발하기 전 이들은 강치성(江致誠)을 올린다.

내용은 용왕에게 무사 하강을 비는 것인데, 이때 祭 주관은「무꾸리쟁이」가 하고, 치성을 잘못 드리면 물귀신이 잡아 간다하여 여자는 일체 접근을 못한다.

또한 특이한 것은 떼가 떠날 때 가족들이 나와 전송도 하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는 習俗이다.

이렇게 치성을 드려도 여전히 물길 사고는 도사리고 있다.

과거 뗏꾼 생활을 했던 이태순옹(71)이 이 일을 버린 이유도「큰포와리」에서 당한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일단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춘천에 도착하면 물길도 넓고 잔잔해지며 여기서 골안뗏사공의 임무는 끝난다.

그리고 서울까지 가는 아래뗏사공은 여기서부터 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순탄한 물기에서 뗏꾼을 못 견디게 하는 것은 인사 한마디 못 받고 떠나온 자신의 처량한 신세와 외로움이다. 덧붙여 끊임없이 그레를 움직여 방향을 잡아야 하기에 힘을 덜어주는 無形의 역할자가 필요하다.

「뗏목아리랑」은 뗏꾼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반려자요, 그레질로 하여 피로해진 근육을 풀어주는 청량제였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가네 / 우수나 경칩에 물풀리니 / 합강정 뗏목이 떠내려가네」 물론 뗏꾼의 위안은「아리랑」뿐만은 아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알싸한 막걸리 냄새를 맡는다.

술과 노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임은 몸으로 일하는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실제로 뗏꾼들의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대부분 술로부터 이루어진다.

「도지거리 갈보야 술걸르게 / 보매기 여울에 떼내려가네」란 가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뗏꾼들의 흥미진진한 생활모습 은「썩쟁이」편력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제에서 서울까지 뗏목 정류처(停留處)에는 예외 없이 주막이 있었고, 거기엔 소위「썩쟁이」라 불리는 여인들이 상주했다.

뗏꾼들이 잠시 정류처에 머물면 썩쟁이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와 뗏목에 오른다.

그리고 술과 안주와 교태를 곁들이면서 목 컬컬하고 외로왔던 뗏꾼의 온 마음을 사로잡는다.

순진한 뗏꾼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면 춤과 노래로 외로움을 풀고 때때로 돈계산을 맞추면 썩쟁이들과 情事도 서슴치 않았다 한다.

아직까지 생존한 몇몇 뗏꾼들의 회고담 가운데서도「썩쟁이」또는「갈보」의 얘기가 잠깐씩 비쳐지는데, 공통된 분 위기는 모두 그 일을 일종의 수치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썩쟁이들과의 수작으로 패가망신까진 안 가더라도, 형편이 넉넉할 리 없었던 뗏꾼의 주머니는 그나마도 더 헐렁해 질 수밖에 없었다.

뗏꾼들 사이에 불리던 썩쟁이란 말뜻을 살펴보면 육체와 정신이 다 썩은 사람, 육체와 육체를 섞는 사람, 즉 썩은 것과 섞는 것을 모두 함축한 말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당시 유명했던 썩쟁이집으로는 춘성군 신북면 윗샘밭의「도지거리」, 의암댐 근처「덕두원」, 경기도 양주군 북한 강, 남한강이 合水되는 근방의「미음」, 팔당댐 근처의「팔당」이며, 그 중에서도「도지거리」주막과「미음」주막은 썩쟁이가 많기로 유명했다.

술과 썩쟁이와의 한판 놀음이 적당히 끝나면 뗏목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왠만큼 술추렴, 계집추렴을 한 포만한 상태에서도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가네 (후렴)
합강정 뗏목이 많다더니
경오년 장마에 다 풀렸네
놀다가오 자고가오 잠자다가오
보름달이 지도록 놀다가가오

십년에 강산이 변한다더니
소양강 변한줄 뉘알았나

놀기나 좋기는 합강정
넘기나 좋기는 거닐고개

뗏목을 타고서 술잔을 드니
만단의 시름이 다풀어지네



구성지기는 강원도아리랑의 공통점인 듯 3·4調 또는 4·4調로 된「뗏꾼노래」에서도 山間民의「아라리」와 同質의 애환을 발견한다. 또한 뗏꾼에게 산이나 물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면 그들이 운반하는 나무는 결국 산의 産物이고, 물 위에서의 고적함은 바로 그 나무 탓이기에…

뗏목이 종착지까지 도착하면 뗏꾼들은 노임을 받게 되는데, 그들은 이를 工價라 했다.

일제시대 때 춘천∼서울간 공가는 보통 30∼35원을 줬는데, 그때 쌀한말이 1월 50전 했다니까 그리 적은 액수는 아 니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농사를 진다면 그만한 몫돈을 만지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또 뗏목을 타도 서울행을 타야지 골안뗏사공은 별 재미가 없었다.


뗏꾼들은 工價를 받아쥔 뿌듯한 기분으로 귀향길을 서두른다. 이때 거개는 광목이나 고무신 등 家事에 필요한 물품을 사는 것이 통례였는데, 일부「끼」있는 뗏꾼은 여전히 색주가에서 농탕질을 하거나 투전판에서 돈을 몽땅 날리는 경 우도 자주 있었다 한다.

오랜 뗏꾼 경력을 가진 林一男옹(75)과  김규근옹(89)은 그런 씁쓸한 옛날 일을 합강정 정자 아래의 원두막에서 막걸리 대신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서 희미하게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래도 어딘가 그들의 老顔엔 강을 주름잡고 다녔던「江通」의 자부심과 호탕함이 짙게 남아 있었다.

'御命이요!!' 외치는 벌목에서부터 山致誠, 떼엮기, 江致誠, 썩쟁이와의 농탕질, 工價지급, 귀향, 다시는 주색질 안 하겠다는 맹서…

이것이 40년 전까지 살아 있던 뗏목과 뗏군의 스케줄이 아니었을까. 또한 강원도 심산유곡의 인정이 한강을 타고 광나루에 전해진 것은 한강의 한 역할이 아니었던가.

「뗏목아리랑」의 재발굴 된 경위는, 인제지역에서 사라져간 뗏목과 그 歷史, 민요, 당시 生活史, 産業史, 복원을 위한 조사과정에서 生存한 뗏꾼들의 증언, 문헌을 토대로 밝혀진 것이다.

이 작업은 85년 강원대 학술조사팀이 주축이 되어 진행됐고,「뗏목아리랑」이란 명칭은 바로 이 과정에서 임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소양강아리랑」이라 하기도 하고「인제 뗏목아리랑」이라고도 불리는 이 뗏꾼아리랑은 학술조사에 앞서 이미 그 전해(84년)「소양제」에서 일반에게 소개된 바 있었는데, 단 아쉬웠던 일은 당시 이태순옹이 불렀던 8절의 아리랑이 모두 급히 그가 작사한 것이라, 옛 것이 충실히 재현되길 바라던 사람들에게 조금은 실망을 안겨준 점이다.

어쨌거나 뗏꾼들의 노래가 다시금 재현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말의 안도로 삼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뗏목아리랑은 가짜가 아니냐는 반문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강원도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의 관계, 또 정선아리랑과 한오백년의 관계처럼 한 뿌리다. 뗏꾼들은 노래말만은 자신들이 만들어 자신들의 아리랑으로 생각하고 불렀던 것이다.

現在 생존한 뗏꾼으로는 인제읍의 김규근(89), 林一男(75), 孫龍仁(74), 沈漢浩(67), 송泰益(66), 朴海順(62), 신북면의 李太順(72)을 꼽을 수 있고, 朴海順氏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60대 후반∼80대 후반의 고령자들이어서 사실상 이 들에 의한 뗏목아리랑의 직접 전수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朴海順氏의 역할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그는 지금 인제축협조합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직접「뗏목아리랑」을 훌륭하게 부르는가 하면, 그것을「뗏목아리랑」전 수학교로 지정된 인제종합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도맡고 있다.

박해순씨 외에도 춘천의 이태순옹은 이들 사이에서 놀기 좋아하고, 노래 잘하는 이로 소문나 있다. 지난 봄 옹을 만났 을 때 "나이 70넘어서 카수가 됐어 카수가…" 너털웃음은 인상적이었다.

지난 여름 민요답사차 인제를 찾았을 때 박해순씨는 노래에 보통 이상으로 애착을 갖고 있음을 엿보았는데 이 분은 숨 어 있는 노래꾼 중의 한사람 이었다. K.B.S 박광희차장이 젊었을 때 여성 편력이 대단했겠다고 하자 대답 대신(술잔을 거절하고) 아리랑으로 넘어갔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가네
뗏목을 타고서 술잔을 드니
만단의 시름이 다 풀어지네」



정선아라리 편


아라리는 地上의 노래




「임자 당신 나 싫다고 울치고 담치고 배추김치 소금치고 열무김치 초치고 칼로 물벤 듯이 그냥 싹 돌아서더니, 이천 팔십리 다못가서 왜 또 날 찾아왔나」

旌善땅이 무어 그리 좋고, 볼 게 많아서 사람이 떠나갔다가 되돌아 오나 싶었다.

산이라도 그저 어지간한 높이까진 아스팔트가 쭉쭉 뻗어있고, 카세트 들고, 세 살짜리 고마 손잡고서도 하루해 넘어가기 전가지 充分히 오르락 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만 아는 都市 촌놈으로서는 旌善을 배꼭이 에워 싼 1000미터 이상의 山만 보 아도 숨이 턱에 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선 기행은 단순한 여행이라면 그냥 때려 칠 숨찬 발걸음이기에 더더욱 고개 고개가 길게만 느껴졌다.

그처럼 정선은 겹겹 山을 따라 구비구비 흐르는 물과 고개를 방패 삼아 최근까지도 客地 사람의 出入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산간 오지 정선이 언제까지나 폐쇄나 정체의 고장으로 남을 순 없었다.

폐쇄 정체 속에서「정선아라리」가 불려졌지만 석탄의 요구는 이 땅의 옹골찬 폐쇄성을 많이 허물게 했다.

예컨대 서울서 정선가지 6백리길, 평창으로 들어서려면 비행기를 탄 듯 높다는 비행기재(麻田峙 651㎝), 별을 만질 듯 하 다는 성마령(星摩領 867m)을 넘어야 하고, 임계를 가려면 반점치(半点峙), 큰너근령, 작은너근령(700m)을 건너야 한다는 等이다.

한마디로 정선은 사람보다 석탄이 넘기 쉬운 곳이고, 이곳의 특산품「아라리」는 석탄따라 여기저기 소개되어 뭔가 感을 잡 으려는 민요채집자들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는 고장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선은「아라리」의 땅이기 때문이고, 멀리서 온 타관 사람들에게 수더분한 선물을 한보따리씩 들려보내기 때문이다. 「아라리」는 진정한 정선의 보배다.

정선 본토배기는「아리랑」을 아라리로 부른다. 그리고 어딜가서든지 '아리랑을 들려주십쇼'하면 '아라리 한번 뽑아볼가'하며 미적지근이 대답한다.

그들에게 아라리 한마디 뽑는 일이 별 것은 아니겠지만, 밑바탕부터의 겸양은 마이크 한번 잡으려「가라오께」를 찾는 요새 사람들에 비하면 사뭇 예스럽고 좋기만 하다.

그런 뱃속에서 나온「아라리」는 잔잔했다.

그리고 톤이 굵은 원시성을 느끼게 한다.



旌善을 싸고 도는 山들은 점잖게 말이 없고, 그 밑에 사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구성진「아라리」를 부른다.

그런데 7백수(七百首)가 넘는 정선아라리 가운데 신명나서 얼렁덜렁 부르는 노래는 듣지 못했다.

하다못해「정선읍내 물나드리 허풍선이 궁글대는 주야장천 물거품을 안고 비빙글 배뱅글 도는데 우리 님은 어디를 가고서 날 안고 돌줄 왜몰라」하는 엮음 가락도 요즈음의 노래맛이 아니다.

다만 입만 달싹달싹 하는데도 그것이 폐부 깊숙이 잦아드는 것이었다.

「정선아라리」에 얽힌 전설 가운데 고려왕의 7신하가 나라는 망해도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지금의 居七賢洞으로 옮아와 과거에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여 立志 시절의 회상과 고향의 그리움, 고난의 심정을 읊은 것이 지금의「아리랑」이 되었다는 얘기다.

전설은 그대로 전설로 놓아두더라도「아라리」에선「珍島아리랑」이나「밀양아리랑」처럼 색깔있고 간드러진 맛은 찾아볼 수 없다.

北面 아우라지 나루에도 전설이 있다.

「아우라지 지장구 아저씨 배좀 건너주오 / 싸리골 올동백이 다떨어진다 /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이 가사에 담긴 얘기 한마디.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건너편 유천리 총각이 깊은 연애에 빠졌는데(아우라지내 는 北面 여량리와 유천리를 갈라 놓고 있 다), 연정에 몸이 단 처녀는 유천리 싸리골에 동백 따러간다는 핑계로 매일 총각과 밀회를 나눴다 한다.

그러던 어느 가을 때아닌 洪水가 나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못 다니게 됐다.

그러니 여량의 처녀나 건너편 총각은 얼마나 애간장이 탔을까?

가사를 보면 총각보다 처녀가 더 몸이 단 느낌이다. 아무튼 1년내내 아우라지내가 不通일리는 없을텐데 그 잠깐을 못 참아 안달하는 처녀 마음은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가사에 나오는 지장구는 실제 인물로 60년대까지 生存했었고, 本名은 池有 成. 장구를 잘쳤다 한다)

하다 못해 아우라지 내, 물레방아 하나를 두고서도 거기에 사랑, 이별, 한탄을 담아내는 산악 사람들의 재주는 그들이 천부 적인 서정 詩人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리고 이들이 저마다 삶의 모습을「아라리」한수(首)에 얹어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다른 어느 고장 사람들보다 많이 누리고 있다. 가령 아우라지 술집에서 술기운이 올라 좀 객기어린 심정이 되면「정선읍내 일백오십호 몽땅 잠들여 놓고서 / 이호장 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한다든가, 예순 넘은 할머니가 해당될 법한「노랑대구리 뒤범벅 상투 / 언제나 길러 길러 내 낭군삼나」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두 노래에도 물론 얽힌 얘기가 있다.

이호장네 맏며느리가 넘어야 했던 성마령에 대해선 엄청나게 높은 고개라서 올라서면 별을 만질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말 인데, 여기에「아질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꽃베리 / 지옥같은 旌善邑內 십년간들 어이가리」하는 가사를 덧붙여 볼 때「성마 령」과「꽃베리」가 서로 어우러진다.

하면「꽃베리」는 또 뭔가.

李朝 時代 어느 관리가 정선을 향해 가마타고 가는데 도무지 끝(베리, 벼랑)이 보이지 않자 가마꾼에게 물었다.

'대체 언제까지 가야하냐'고, 그것도 여러번을…

관리가 물을 때마다 가마꾼은 능청스럽게 '곧', '곧'을 연발했다.

그런데 그「곧」이「꽂」이 돼 지금의「꽃베리」로 불려졌다. 다른 가사는 옛날 한 처녀가 한 스무살 쯤 되어 민며느리로 들 어갔는데, 신랑은 훨씬 나이가 어려 사내 구실을 못하자 일도 고되고, 가슴도 심란한 이 처녀 부인은 차라리 朝陽江에 투신 하자는 맘을 먹는다.

그러다 빙글빙글 도는 물레방아를 보고 언젠가 제 남편도 사내 구실을 하려니 하고 다시 되돌아 섰다는 전설을 남기고 있다. 산이 깊고 물 흐르는 곳에서 충분히 노랫말이 되었을 법하다.

旌善의 山은 1000미터가 넘는 것들만 해도 10개가 넘고(상원산, 노추산, 석전산, 고적대, 함백산, 백운산, 중왕산…등) 물은 白頭大幹의 허리에 해당하는 오대산에서 대관령을 지나 정선읍내를 싸고 도는 朝陽江, 아우라지내가「아라리」덕택에 좀 알 려져 있을 뿐이다.



山이 하도 높아서 하늘이 세뼘이라느니, 해가 뜨자마자 넘어가느니 하는 말은 이 地域의 地勢가 얼마나 험하며 상대적으 로 農土가 얼마나 적은가를 반증한다.

그래도 그 좁은 땅을 利用해 山間民들은 삼도 심고, 누에도 치고, 콩밭도 매며「아라리」란 보배를 무더기로 양산해냈다.

「아라리」의 창조자는 바로 이들인 것이다.



지금의 정선은 분명 옛 정선이 아니다.

바하에서 조용필까지, 막걸리에서 시바스 리갈까지, 최신 브레이크 댄스까지 몰려올 건 죄다 몰려와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소박하고 끈질긴 아리랑이라도 때묻을 수 밖에 없다.

본토박이 사람들은 이런 세태를 매우 역겨워한다.

더구나 아리랑을 유행가 가수가 엉덩짝을 돌려가면서 부르는데는 격한 분노를 나타낸다.

다른 곳이라면 혹 몰라도 이 땅에선 아리랑도 꼭 아라리여야 하고, 어설픈 대중화는 절대 금물인 것이다.

이런 외고집으로 정선 사람들은「아라리」를 강원도 지방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고 기능보유자로 최봉출씨, 유영란시 를 지정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어렸을 적부터 아라리를 주입시키기 위해 정선여고를 정선아리랑 연구학교로 지정했다.

이밖에도 이 郡의 향토문화제인「정선아리랑제」에서도 해마다「정선아리랑 부르기 대회」를 여는 등, 옛 것을 잃지 않으려 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현재 아라리 보존을 위해 동분서주 하는 몇사람 중에 연규한씨(정선 부군수)는 行政的으로 많은 뒷받침을 하고 있으며, 전태 화씨(정선의원 원장)는 동호인을 규합해 보존위원회를 구성,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과거에「아라리」를 빼어나게 잘 불렀던 사람으로 高德明, 金千有, 朴順泰, 鄭明? ?氏를 들 수 있고 朴順泰氏 같은 사 람은 최초로「아라리」를 음반에 취입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古有의「아라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스런 일이나, 이 거창한 정선사람 공동작 품을 일개 문중 위주로 과대선전 한다든가 왜곡시키는 일은 삼가야 함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정선은 예나 지금이나 토양이 박한 땅이다.

벼농사를 지어도 주민이 먹는 양의 절반도 조달치 못한다. 대신 밭농사가 성해 옥수수, 콩, 감자가 농산물의 대부분을 차 지하는데, 농가 인구는 전체 郡民의 25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인구는 대부분 광부나 그 가족들,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다.

이 척박한 땅에서 캐낼 수 있는 것은 시커먼 석탄과 철, 아연 등이고, 이것을 채굴하기 위해 콩밭은 광산으로 변해버리 고 말았다.

정선의 주된 변화는 이것이다.

얼마 안되는 밭이랑을 갈며 한숨짓던 사람들은「아라리」를 불렀지만, 과부들은 석탄을 캐면서「아라리」를 부르지 않는 다는 것과 생활이 풍족하면 풍족할수록 진짜 아라리는 본직을 잃어버릴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정선아라리」는 예전엔 거기 사는 사람들이 마음이 고달파서 불렀지만, 지금은 그「아라리」가 소멸되어 가는 것 때문 에 오히려 서글프고 애가 타는 고장 정선.

더구나 넘나들기 힘든 이 땅에 터널을 파서(비행기재터널) 뭇사람이 오고 같다면 더욱 변질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선은 이곳을 찾는 뜻있는 이들에게 토산품「아라리」가락을 한 보따리씩 선뜻 안겨줄 수도 있는 곳이다.

이북지방 편


눈물 섞어 봇짐싸던 큰애기의 한숨




「어랑타령」엔 꽤나 신식 냄새가 풍기는 전설이 묻어 있다.

일명「신고산타령」이라고 하는 이노래는 요새 학생들 간에도 소주잔 몇번 오가면 쉽게 불리워 지고 있고 이보다 는 팔도 재주꾼이 다 모인 예비군 훈련장에서 더 진하게 들을 수 있다.

「신고산이 우르르(어떤 사람은 우르릉 쿵탕) 화물차 떠나는 소리에 고무공장 큰애기는 담봇짐만 싸누나 / 어랑어 랑 어허야 어리럼마 둥둥 내사랑이로구나」

그런데 여기 나오는 신고산은 무슨 山이름이 아니라 경원선(서울-元山)의 한역「新高山」을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화물차가 등장하고 고무공장이 등장하는 것만 봐도 이 함경도 노래가 얼마나 新式인가를 족히 느낄 수 있다.


경원선에 얽힌「어랑」이 이야기에서 이 철도는 단순히 한 소품으로만 등장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시절(1905년 무렵)함경도 안변 어촌에 사는 어랑 처녀로부터 시작한다.

어랑은 한 뱃사공의 딸이었는데 아버지를 풍랑에 잃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두 모녀가 생활을 꾸려가자니 가난은 기정 사실이었고 어랑의 아버지가 동리 부자 姜船主에게 진 큰 빚가지 짊어지 게 되어 그들의 걱정은 태산같았다.

강선주는 거의 매일 빚독촉을 해왔다.

그럴 때마다 어랑의 노모는 갚을 길이 막막하여 왜 남편이 진 빚을 두 모녀가 갚아야 하느냐는 항변도 해봤다. 그러나 강선주가 노모의 사정과 항변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어느 날은 오히려 동리 제일의 미인 어랑이를 그믐가지 빚을 갚지 않으면 빚 대신 데려가겠다고 일방 통보해왔다.

그날 저녁 바닷일을 마치고 어랑이가 돌아왔을 때 노모는 낮에 있었던 일을 모두 딸에게 털어놨다.

어랑의 가슴엔 어쩔 수 없는 슬픔이 짙게 깔려왔다.

'대체 무얼 가지고 장리빚을 갚나…'

아무런 대책도 서지 않은 채 두 모녀는 수심에 찬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믐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마침내 강선주가 통보한 그믐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어랑의 머리 속엔 징그러운 강선주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의 모 습이 자꾸 떠올랐다. 차라리 자결해버릴까 하는 금찍한 생각이 자꾸 맴돌기도 했다.

그때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드러진 마의 목소리, 또다른 조선 사람의 목소리(통역인), 그리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아녀자의 목소리. 어랑은 아무 생각없이 밖으로 나가 사람들 틈에 끼었다.

어랑이 처음에 무심코 듣고 있었던 日人의 얘기란 서울에 자기가 경영하는 고무공장에서 여자 직공을 모집하니 생각이 있 으면 자기를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조건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가지 준다는 것.

갑자기 어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강선주에게 팔려가지 않아도 될 길이 생긴 것이다. 대신에 오년 동안 日人에게 빌붙어 살아야 한다. 하지만 강선주의 품에 안 기지만 않는다면 그게 대수인가…

이튿날 어랑은 노모와 新古山역에서 작별의 눈물을 흘린다.

레일 위로 야속한 기차는 우르르 소리르 내며 떠나고…

「어랑타령」의 가사는 꼭 공장에 일나가는 女工들의 얘기만 담은 것이 아니다.

「이산 넘어를 가라할가 저산 넘어를 갈가 / 총각낭군 다리고 수풀놀음을 갈가」

「울타리 꺾으면 제가 나온다더니 / 한모퉁이 헐어도 꼼짝이 없다」

이런 가사에선 전혀 개화기의 급한 물결을 느낄 수 없다.

한편 민속학자 임동권교수는「원산아리랑(어랑타령)에 대해「元山아리랑」은 서울의 본조아리랑보다 가락에 있어 여유 가 있어 좋다. 서두는 기색이 없고 내용에 있어서도 史的 사건이나 정치적 문제를 노래하는 것이 적고 낭만과 생활 주변 의 일들을 노래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렇다면「화물차 떠나는 소리에…」하는 유명한 가사는 본질적으로 그의 주장 과는 거리감이 있다.

어쨌거나 西洋의 산물은 우리네 江山에 들어오는 족족 토속의 우리것을 변질시킨 사실들을 여기서도 똑똑히 느낄수 있다.

아리랑은 그 뿌리를 우리 땅, 우리 민족의 가슴에 묻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소박하고 끈질긴 것이다.

그래서 제 아무리 좋은 것이 아리랑에 접합되어도 그것은 때묻은 것으로 보인다.

「어랑타령」을 단순히「부르는 노래」로 생각할 때야 시대 상황이건, 시대에 따른 아픔이건 그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新高山역과, 레일을 울리며 다가오는 기차를 떠올릴 때면 뭔가 치열하고 절박하기만 한 이 시대의 상황이 자연스럽 게 연결된다.

서울·경기 편


노비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어떤 사람은「서울아리랑」혹은「本調아리랑」이라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은「경기아리랑」이라 부르는데 일단 가장 포괄 적 地域名인「경기아리랑」이라 불러보자.

1926년 春史 羅雲奎가 연출. 주연을 한 영화「아리랑」은 장안의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우리 손으로 만든,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 구름같이 단성사로 몰려든 관객들은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 가서 (영진이 살인 죄목으로 잡혀갈 때)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목청을 돋구어서 모두 같이「아리랑」을 불렀다 한다.

그 감격적인 순간을 그때 그 관객들은 잊을 수 있었을까.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는 그 험악한 세상에 말이다.


지금 가장 잘 알려진 이「아리랑」의 보급 경위는 나운규 영화「아리랑」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다.

통신매체도 거의 없고 교통도 불편한 때 활동 사진이라는 것은 폭발적인 인기였다. 이 영화라는 매개물이「아리랑」노 래 전달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

아무튼 나운규가 얼마나 아리랑에 공헌을 했는지 사람들은 아리랑을 불렀다 하면 영화「아리랑」에서 불리워졋던 주제 가 경기아리랑을 부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운규의 아리랑이 아무리 보편화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原流가 아니다. 그가 영화「아리랑」에 서 경향각 아리랑 가사를 차용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원아리랑과 아무런 관계 없이 독립된 또 하나의「변형아리랑」이 란 점이다.

당시 나운규와 같이 출연한 영희 역의 申一仙(75)은「아리랑」이 상영되기 이전엔 그러한 가락이없었다고 자신있게 이 야기하며 그 곡은 나운규가 작사했고 가락은 단성사음악대에 주문해서 만들었다 한다. 특히「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란 가사는 완전히 창작된 것임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경기아리랑」엔 그럴 듯한 傳說이 남아 있다.

離郞이란 노복과 成富란 노비의 사랑 이야기.

경기도 어느 지역에 김판서가 낙향해서 살고 있었다 한다. 이 사람이 인근 농토를 장악하고「장리」,「도지」,「물세」등 을 가혹하게 받아내는 바람에 농민들은 매년 끼니 잇기가 힘들었다. 거기에도 설상가상으로 어느 해 극심한 흉년이 들어 마 을 사람들은 거의 아사 직전에 이르렀다.

그래도 김판서의 가혹한 수탈은 멈추지 않았다. 자연히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극으로 치달려 김판서를 쳐 없앨 모의를 하 기에 이르른다.

한편 김판서 집엔 성부란 노비와 리랑이란 노복이 있었는데 둘은 터놓고 말은 못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리랑은 동 리 사람들의 모의에 깊이 가담하고 있었다.

성부도 사랑하는 리랑의 일에 반대할 리가 없었다. 모사는 빈틈없이 무르익어 갔다.

마침내 거사일로 작정한 시월 그믐날이 닥쳤다.

달도 없는 캄캄한 어둠을 틈타 농군들은 김판서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김판서를 처단한 즉시 관가를 습격해 대부분의 아전을 죽이고 말았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급히 관군을 풀어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관군의 창칼 앞에 농민들은 이겨낼 도 리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죽음을 당했다.
다행히 성부와 리랑은 구사일생으로 마을을 탈출해서 인적이 드문 수락산 속으 로 숨어들었다.

관군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성부와 리랑은 부부로 결합되어 몇 달 동안 그런대로 행복하게 지내게 된다.

그러나 리랑의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다시 사람을 규합해 탐관오리와 대항하겠다는 재거사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달덩 이 같은 어여쁜 성부와 이별해야 한다는 아픔이 거사계획 못지않게 그를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날 리랑은 자기의 속뜻을 성부에게 호소했다. 성부는 침묵으로 승낙했고 리랑은 꼭 백일이 되면 온다고 약속했다. 山中에 혼자 남은 성부는 리랑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작은 밭을 일구고, 해가 질녘이면 '리랑-'하고 외쳤다.

그런 성부의 아리따운 모습은 차츰 동리 사람들 눈에 띄게 되었고 마침내 어느날 음탕한 산마을 부자 백가의 눈에도 띄 고 만 것이다. 그날부터 백가는 추근대며 성부를 꾀어내기에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시작했다.

성부가 백가를 피하면 피할수록 백가의 눈은 더욱 충혈 되어갔다.

매일같이 찾아와 아랫목에 버티고 앉은 백부자를 속여 넘기는 것도 한두번이지 성부는 더 이상 그를 피할 꾀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성부는 리랑의 제사만이라도 치르고 몸을 허락하겠노라 백부자에게 말했다.

리랑의 거짓 제사가 치러지는 날도 백부자는 일찌감치 성부의 방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성부는 부엌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체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날이 바로 리랑이 돌아오마고 약속하며 떠난 지 꼭 백일이 되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지자 제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백부자는 빨리 제사를 치르라고 성화를 해댔다.

그때 인기척과 함게 한 사내가 방문을 열어 젖혔다. 한동안 세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먼저 리랑의 비수가 번득여 백부자를 쓰러뜨렸다.

리랑은 아내 성부가 백부자와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잘못 알았다. 그렇게 의심하게 되니 칼날은 백부자에게서 성부로 옮겨졌다.

그러나 리랑은 차마 성부를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간다'란 말을 남기고 리랑은 훌쩍 성부곁을 떠난 것이다.

뒤에 남은 성부는 사라진 리랑을 부르며 산속을 헤메다 결국 자결하고 만다. 아리랑의 전설은 예외 없이 모두 슬픈 것 뿐이다.

그저 평범하기만 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겨진 애절한 恨의 무게를 재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재어 볼 수도, 만져 볼 수도 없는 것이기에 이야기로 엮어내고, 노래로 삭히면서 사람들이 토해내는 핏덩이! 그것이 전설에 얽힌 아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