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도쿄-평양 삼각공동취재

"2002년 4∼6월 남북해외 참여 대규모 행사 '아리랑 축제' 열린다"

                                                                        ( 신준영 young@minjog21.com )

지난 9월 20일 서울의 각 종교 사회단체 사무실에 평양으로부터 팩스가 날아들었다.

9∼10월중에 잡혀있던 방북행사 일정들을 '당분간' 연기하자는 내용이었다.

각 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상당히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합의사항 이행 및 교류 활성화로 8·15의 역풍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민간교류 연기 배경을 둘러싸고 △10월 중 네 차례 열리는 당국간 회담 일정으로 인한 실무인력 부족 △9·11 뉴욕 테러 사태로 인한 위기의식 고조 등 여러 요인들이 제시되었으나 '추론'에 불과할 뿐이었다.

10월 하순, 일부 대북지원단체들의 방북이 재개되면서 여타 민간교류도 곧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한 대북지원단체 관계자는 "우리 쪽 방북도 지난 6·15∼8·15 통일 행사들로 연기되어온 일정들을 연내 소화하는 수준일 뿐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밝혔다.

통일연대 측이 북측 민화협에 제안한 '신년공동행사' 문제를 제외하고는, 남측 민화협 등 대부분의 사회단체 관계자들은 "9월말 연기된 일정에 대한 북측의 회신은 아직 없다"면서 "연내 재개는 어려울 것"이란 반응들이었다. "8·15와 같은 결과 낳아선 안돼" 민간교류 연기사태의 실질적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필자는 도쿄의 《조선신보》 본사에 취재를 의뢰했다.

그런데 10월 중순 당시 방북취재 중이던 《조선신보》문광우 편집부국장으로부터 "현재 북측은 민간교류 중단이 아니라 향후 민간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진행하기 위해 제반준비와 조직개편에 들어가 있다"는 상황이 전해졌다. 여기서 '조직개편'이란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5차 장관급회담 북측수석대표 교체도 같은 맥락의 일일 것이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11월초 평양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조선신보》 문 부국장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내년 4월에서 6월에 걸쳐 북남 해외가 참가하는 '아리랑 축제' 가 진행됩니다. 그 시기 대규모 북남 민간교류가 진행될 것입니다. 북측 실무자들은 현재 그 준비에 집중하고 있어 연내 민간교류 활성화는 어려울 듯합니다." 아울러 그는 북측의 내년 행사 기획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난 8·15행사에 대한 심도 깊은 평가가 진행되었습니다.

북측의 기본적인 입장은 '문제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문제삼은 게 잘못'이라는 것이나 어쨌든 향후 행사가 다시금 그런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점은 확고합니다." 문 부국장은 "지금 당국간 관계가 어려운데 어떻게든 회담을 잘 이어가야 내년 행사도 성과 있게 진행될 것이며 이 점을 북측도 깊이 인식하고 있다"면서 "비상경계태세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어떻게든 풀어보려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문 부국장의 전언 중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바로 8·15행사에 대한 북측의 평가 내용이다. 종전까지 북측은 8·15행사에 대해 "화해와 단합에 기여한 뜻깊은 행사"라 평가해왔다. 지난 9월 15일 필자는 금강산에서 만난 한 민화협 관계자에게 "8·15행사에서 보듯 방명록 때문에 복잡한 문제가 계속 일어나는데 당분간 그런 절차를 생략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물었다.

당시 그의 답변은 "방문자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의견을 표현한 것인데 그걸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이 잘못 아닌가"라는 원칙적인 기조였다. 그런데 문 부국장에 따르면 북측은 8·15행사 이후 냉전수구세력들의 공세로 통일부장관 해임에까지 이른 사태 전개를 보면서, '문제될 수 없는 사안'들도 남쪽 내부 정쟁에 휘말릴 경우 '그렇게까지 치달을 수 있음'을 새삼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후 민간교류 행사들이 '그와 같은 결과를 낳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관계일꾼과 실무자들은 기존 행사를 '총화'하고 새로운 원칙과 방도를 토론해야 한다.

기왕 잡혔던 민간교류행사들이 일제히 유보된 것은 그 파장으로 보인다. 한편 '아리랑 축제'는 북측이 설정한 2002년 남북민간교류의 기본방향을 짐작케 한다. 4월에서 6월 사이 대규모 남북공동행사 개최를 통해 화해 단합 분위기를 고양시키면서 6·15 2주년을 맞고 그 흐름을 8·15까지 밀고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 일정이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6월의 월드컵이 남북당국간 대화 진전에서 중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리랑 축제'의 윤곽은 지난 11월 7일 조선중앙통신 보도로도 확인된다. 이 날 조선중앙통신은 "내년 2·16 개막을 위해 '10만명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창작해 연습 중에 있다"고 보도했다. 10월 하순 방북 했던 우리민족서로돕기 이용선 사무총장 등 여러 인사들도 "평양거리 곳곳에서 집단체조 연습 광경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북측이 노동당 창당 55돌 행사에 남측 인사들을 대거 초청했을 때 필자는 북측의 한 관계자에게 "왜 하필 남쪽 보수세력들이 예민하게 보는 시기에 민간 인사들을 초청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보여줄 만한 것을 준비했을 때 손님들을 모셔야지 아무 때나 하겠는가"라고 답했는데 그가 말한 '보여줄 만한 것'이 '55돌 경축 10만명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임을 며칠 후에 알게 되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연습은 2002년 민간교류를 위한 준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아리랑'인가? 그런데 '아리랑'이란 축제 명칭이 이례적이다. 11월에 평양을 방문했던 한 재일동포는 "애초에는 관계일꾼들이 내년 행사에 태양절 관련 제목을 붙였으나 국방위원장 지시로 '아리랑'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평양 사람들 사이에 돌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얘기다. 지난 8.·15행사의 최대 난관은 3대헌장기념탑 논란이었다. 내년 행사에 태양절 관련 제목이 붙는다면 그로 인한 파장은 8·15행사를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북의 정서에서 4월 행사에 태양절 관련 명칭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는 북측의 '8·15 행사 총화'의 심도를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현시점에서 남측 통일운동 진영도 8·15행사에 대한 정확한 평가 위에서 향후 일정에 대비해 나가야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 양 당국이 반대하지 않는 좁은 문을 열고 가는 것은 민간교류 주체의 항상적 과제다.

내년 행사가 민족의 화해와 단합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의미 있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남측 주체들의 차분한 준비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월간 <민족21> 2001년 12월호 44∼45쪽. .

ghw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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